2002년 4월30일 오전 서울 대치동 하이닉스반도체 본사에서는 메모리 사업부문 매각 여부를 최종 결정할 이사회가 열렸다.
소액주주와 임직원 대다수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독자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여론에 힘이 실렸다. 전날 열린 채권단 전체회의에서도 정부의 강력한 매각의지를 반영, 매각안을 승인했다. 그러나 하이닉스반도체 이사회는 예상을 깨고 매각안을 부결시켰다. 독자생존에 표를 던진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 하이닉스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12인치 메모리반도체 라인을 세워야 했다. 국내에선 투자를 끌어낼 수 없어 중국에 짓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런데 반도체 기술유출 우려가 발목을 잡았다. 당시 최첨단 공정이었던 12인치 기술이 중국으로 넘어갈 경우 한국과 중국의 반도체 기술격차가 순식간에 줄어들기 때문이다.
정부와 채권단은 고심 끝에 중국 진출을 승인했고, 2004년 4월 하이닉스반도체는 중국 장쑤성 우시(無錫)시와 현지공장 설립 본계약을 체결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한 SK그룹은 요즘 SK하이닉스 덕에 웃고 있다.
SK하이닉스 중국법인은 지난해 공장 건물과 부지에 대한 사용권을 매입했다. 우시시와 투자계약 체결시 장기임대 조건으로 사용을 허가받았는데, 2006년 양산 후 6년동안 수익금 중 일부를 유보금으로 꾸준히 모아 사용권 매입에 나선 것이다.
SK하이닉스 중국법인 관계자는 "SK하이닉스 본사 입장에선 이미 투자금을 회수하고 잘 운영되는 해외공장 하나를 남긴 셈이 됐다"며 "중국법인은 이미 스스로 EBITDA를 창출해 본사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수익구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10년을 내다본 투자결정이 신시장을 개척한 셈이다.
▲ 삼성전자 시안 반도체 신규라인에서 생산된 낸드플래시 |
◇ 삼성전자 시안공장도 '백년대계'
삼성전자는 이달초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에서 반도체공장 준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제품생산에 돌입했다. 이 공장은 지난 2012년 9월 기공식을 갖고 약 20개월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준공했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기공식 당시 기자들과 만나 "중국의 반도체 시장이 커지면서 선제적으로 진출할 필요가 있는데다 수요업체들의 요구도 있고 중국의 풍부한 인재와 혜택 등의 유인도 있었기 때문에 진출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PC의 80%가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등 중국의 반도체 수요가 늘면서 가까운 곳에서 만들어 달라는 고객사의 요구가 있었다는 뜻이다. 제품 주기가 빨라져 1·2등 하는 회사도 장사하기 힘든 만큼 과감하게 선제 대응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이유가 작용했다.
삼성전자는 시안공장 가동으로 한국, 중국, 미국을 연결하는 '글로벌 반도체 생산 3거점 체제'를 구축했다. 시스템반도체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 모든 반도체 제품을 생산·조정하는 한국 등 최적의 포트폴리오가 완성됐다는 설명이다. 이를 통해 반도체 1위 아성을 지켜간다는 계획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시안공장은 중국 외자기업 단일 투자 최대규모"라며 "미래시장을 내다보는 혜안이 없었다면 투자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 신흥국 진출 추진전략 [자료=삼성경제연구소] |
◇ 미래성장 승부처를 만들라
파이낸셜 타임즈(FT)는 지난해 글로벌 기업 유니레버와 P&G의 엇갈린 실적명암을 분석했다.
신흥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진출전략을 펼친 유니레버는 2012년 전체 매출의 55%를 신흥국 시장에서 달성했다. 특히 전체 매출은 아시아와 중남미 시장 성장세에 힘입어 전년비 10% 이상 성장했다. 반면 동종업계 1위인 P&G는 2012년 신흥시장 매출비중이 전체 매출의 40%에 그쳤다. P&G의 매출성장율은 3%에 그쳤다.
최근 글로벌 기업을 중심으로 중국 뿐만 아니라 여타 신흥시장에 대한 진출전략이 확대되고 있다. 성장성이 약화된 유럽 등 선진시장보다 미래성장을 위해 신흥국 진출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폭스바겐은 신흥국 시장을 중심으로 판매전략을 펼쳐 오는 2018년까지 판매 1위를 기록한다는 목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신흥국 진출을 위해선 필요한 조직과 경영관행을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도요타는 작년 사업부를 4개로 통폐합하면서 중국, 중남미 등 신흥시장을 전담할 사업부를 신설했다. GE는 인도네시아의 가루다항공, 국영 석유회사인 페르타미나, 전력회사인 PLN 등과 인프라 개발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향후 5년간 3억달러를 투자키로 했다.
GM도 향후 2년내 아프리카 중산층 자동차 수요가 200만대 수준으로 올라설 것으로 보고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 시장을 공략키로 했고, 중국 화웨이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 제휴해 아프리카 소비자를 겨냥한 초저가 스마트폰을 개발·판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