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정유사들 실적이 좋아질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지만 정유업황 자체에 대한 전망은 부정적이다. 여전히 석유공급은 과잉이고, 석유제품을 생산하는 정제설비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계의 시각도 다르지 않다. 대한상공회의소는 하반기 정유화학업종의 산업기상도를 ‘흐림’으로 분류했다. 중국과 인도 등에서 설비 경쟁이 빠르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석유제품 과잉 공급으로 인해 시장에서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 국제유가, 안심하기엔 이르다
2000년대 중반까지 국내 정유산업은 생산된 석유제품의 60%를 국내에서 소비하는 내수 산업이었다. 이후 2000년대 후반 들어 정유사들이 정제설비 고도화에 투자하면서 내수에서 수출 위주로 산업이 전환됐다. 최근에는 전체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59%에 달한다.
이같은 구조로 정유업황은 대외적인 변수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특히 원료인 국제유가에 가장 민감하다. 국제유가 변동에 따라 재고손실 혹은 이익이 발생하고, 석유제품 수요가 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하반기 국내 정유사들은 국제유가 급락의 여파로 대규모 재고손실이 발생해 30여년 만에 연간 적자를 기록했다. 반대로 올 상반기에는 국제유가가 안정화되면서 석유제품 수요가 늘어 정제마진이 개선됐고, 재고이익까지 더해져 많은 수익을 거두고 있다.
▲ 자료: 한국석유공사 페트로넷 |
하지만 문제는 하반기다. 국제유가가 다시 요동칠 가능성이 큰 탓이다. 특히 미국과 이란의 핵협상이 타결되면서 이란으로부터 원유공급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이란의 원유생산량은 제재 이전보다 100만 배럴(하루 생산량) 줄어든 280만 배럴 수준이다.
오세신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란은 그동안 유조선을 이용해 2000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저장했고, 원유생산을 늘리기 위해 준비해왔다”며 “단기적으로 이란의 원유수출이 50만~80만 배럴 정도 증가하면 석유시장에서 과잉 공급되는 양이 늘어날 것이고, 이로 인해 국제유가가 올해 최저치인 배럴 당 40달러 수준까지 급락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 치열해진 아시아 석유제품 시장
국제유가 하락과 함께 정제설비의 증가로 석유제품 가격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다. 특히 국내 정유사들의 주요 수출시장인 아시아에서 중국과 인도 등 새로운 경쟁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중국의 정제능력은 2009년 1060만 배럴(하루)에서 지난해 1340만 배럴로 확장됐다. 인도의 경우 같은 기간 370만 배럴에서 430만 배럴로 증가했다. 두 나라가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차지하는 정제능력 비중도 48.3%에서 54.2%로 5.9%포인트 늘었다.
석유제품 시장에 공급되는 제품량이 많아졌지만 중국을 비롯한 글로벌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면서 수요 증가폭은 둔화돼 정제마진이 낮아지게 된다.
미국도 셰일자원을 바탕으로 원유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 미국 정유사들은 자국에서 생산된 원유로 원가절감 효과를 누리며 가동률을 높여 석유제품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있다. 결국 원가 경쟁력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저가공세도 정제마진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볼 수 있다.
▲ 미국의 저가공세와 아시아 지역에서의 정제설비 증설로 석유제품 정제마진은 최근 몇 년 동안 약세를 보였다. 올 상반기 유가 급락에 따른 제품 수요 증가로 정제마진이 일시적으로 상승했지만 하반기 재차 하락할 것으로 예측된다. (자료: IEA, 에너지경제연구원) |
박연주 KDB대우증권 연구원은 "하반기에는 상반기보다 수요 모멘텀이 부족하고, 정제설비 가동률이 높아질 가능성이 커 정제마진이 현 수준을 유지할지는 불확실하다"며 "실제 6월 이후부터 정제마진이 둔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 비 석유 에너지 사업에도 관심 필요
정제마진이 악화되면 국내 정유사들의 수익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정유사업이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서다. 특히 원유와 석유제품 모두 내수보단 국제 석유시장 의존도가 높은 탓에 외부 환경 변화 위험에 노출돼있다.
결국 정유사업 비중을 낮추고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사업을 찾아야 하는 게 관건이다. 현재 국내 정유사들은 정유외에 석유화학, 윤활유 등의 분야에 진출해 있고, 새로운 사업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석유를 기반으로 한 에너지 기업인만큼 다양한 분야의 에너지사업 진출을 준비할 필요도 있다.
▲ 국제유가 급락, 정제마진 악화 등 대외변수로 인해 국내 정유사들의 실적이 곤두박질쳤다. 이로 인해 전체 매출에서 정유사업이 갖는 비중을 줄이고 다양한 사업에 눈을 돌릴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자료: 산업통상자원부) |
SK이노베이션의 경우 배터리 사업을 비롯해 미국의 석유 광구개발 사업을 통해 미래 에너지원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GS칼텍스 역시 신소재인 탄소섬유, 대체 에너지로 각광받는 바이오부탄올 생산 기술을 확보한 상태다. 다만 아직까지 본격적인 상업 생산에 들어가진 않았다.
이와 함께 중동에 의존하고 있는 원유 수입처를 다변화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지난해 현대오일뱅크는 정유사업만을 하면서도 원유 도입처 다각화와 결제시기 조정 등을 통해 정유사 중 유일하게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정준환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정유사의 사업포트폴리오 다각화는 석유산업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에너지사업 분야로의 진출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며 “향후 공기업 독과점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전력 및 가스 등의 분야를 민간부문에 개방할 때 적극적으로 사업다각화를 추진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역별로 원유가격 차이가 발생하면 원유도입선 다변화를 통해 공급안정성 확보 외에도 정유사 수익변동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정부도 원유도입선 다변화 제도가 정유사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지원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정유사들이 미래 사업을 준비하고 있지만 주력인 정유사업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는 않다”면서도 “현재 제품을 수출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시장의 수입 및 판매부문에 진출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