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영특한 토끼의 특성과 지혜를 상징하는 검은색이 조화를 이룬 계묘년, '검은 토끼의 해'다. 하지만 우리 기업을 둘러싼 대내외적 환경은 녹록지 않다. 국가 간 갈등은 장기화되고 고물가, 고환율, 고금리, 저성장 등 여러 경제위기 요인도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대기업집단 총수들은 '토영삼굴(兎營三窟)'의 지혜로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최고경영자(CEO)들의 경영 과제와 판단의 방향을 신년사 등에서 엿보이는 열쇳말과 함께 들여다봤다.[편집자]
최태원 회장이 진두지휘하는 SK그룹의 올해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기업 경영에 비우호적인 대내외적 환경뿐만 아니라 반도체 한파로 그룹 수익의 대부분을 책임졌던 SK하이닉스까지 휘청이는 형국이다. 최 회장의 새해 신년사에서 그룹 수장으로서의 책임감과 고뇌가 느껴졌던 이유다. ▷관련기사: 최태원 SK 회장의 올해 키워드는 '관계·신뢰'(1월1일)
경제단체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의 회장이기도 한 그는 대한상의 신년사에서도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최 회장은 "올해 대내외 경제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다"며 "지정학적인 긴장은 언제 해소될지 알 수 없고 세계경제는 상당기간 불확실성에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각종 경제지표들은 견고하지 못하고, 방향성에 대한 신뢰도 약해지면서 기업활동을 더욱 움츠러들게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이같은 위기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이른바 '이환위리(以患爲利)'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그와 그의 행보를 지지해주는 '찐팬(진짜 팬)'이다.
"위기를 기회로" 이환위리 정신
현재 최 회장에게 위기는 현실이다. 작년 3분기 연결기준 SK하이닉스·SK이노베이션·SK텔레콤·SK E&S·SK실트론·SK에코플랜트·SK가스·SK케미칼·SK네트웍스·SKC(이상 영업이익순) 등 SK 주요 10개 계열사의 영업이익은 총 3조627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8.2% 감소했다. 그룹의 캐시카우인 SK하이닉스가 전례 없는 반도체 수요 둔화에 따라 '어닝 쇼크(실적 충격)'를 기록한 영향이다. 같은 기간 전체 영업이익 중 SK하이닉스의 비중도 71.1%에서 45.6%로 대폭 줄었다.
4분기에는 적자 전환까지 예상된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4분기 영업적자는 8061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만약 SK하이닉스가 예상대로 분기 적자를 기록하면 이는 2012년 3분기 이후 약 10년 만이다.
이같은 위기를 의식하듯 최 회장은 지난 1일 전체 구성원에게 이메일로 보낸 신년 인사에서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며 경영시스템을 단단히 가다듬는 기회로 삼아 나아간다면 미래는 우리의 편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대한상의 신년사에서 언급한 손자병법의 '이환위리'와 일맥상통한다. 이환위리는 '고난을 극복해 오히려 기회로 삼는다'는 뜻이다. 우리 기업 앞에 닥친 위기가 다소 버겁게 느껴지더라도 미래를 향한 도전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환위리는 위기를 이겨내기 위한 최 회장의 핵심 키워드다. 그는 지난해 10월 제주도에서 열린 '2022 CEO세미나' 폐막 연설에서도 "경영환경이 어렵지만 비즈니스 전환 등을 통해 새로운 해법을 찾으면서 위기 이후 맞게 될 더 큰 도약의 시간을 준비하자"며 이환위리를 인용한 바 있다.
최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2' 부스를 찾은 최 회장의 발언에서도 이환위리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최 회장은 부정적 경기 전망에 대해 "돌아가는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계획해 준비 태세를 잘 갖추겠다"며 "경기 변동과 관계없이 미래에 대한 준비를 꾸준히 할 생각"이라고 언급했다.
위기 속 '관계'가 만드는 기회
최 회장이 이환위리의 실현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꼽은 것은 '관계'다. 개인뿐 아니라 기업에게도 관계가 중요해지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관계와 신뢰의 깊이를 다져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SK를 지지하는 '찐팬'을 만드는 것이 올해 그의 최종 목표다.
그는 "앞으로 기업의 경쟁력은 관계의 크기와 깊이, 이해관계자들의 신뢰의 크기가 될 것"이라며 "나를 지지하는 찐팬이 얼마나 있는지, 내가 어떤 네트워크에 소속돼 있는지가 곧 나의 가치"라고 강조했다.
CES 2023에서도 SK 계열사들의 '찐팬 만들기' 움직임이 이어졌다. 최 회장은 수행원이 코로나에 확진돼 당초 계획한 비즈니스 미팅들을 화상 회의로 대체해야 했다. 대신 최재원 그룹 수석부회장을 비롯한 SK 최고 경영진은 글로벌 기업인들과 다양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 유영상 SK텔레콤 CEO(최고경영자)는 퀄컴 크리스티아노 아몬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 CEO들을 만나 반도체 및 AI 사업협력 방안 등을 논의했다. 특히 박 부회장은 아몬 CEO와 반도체 관련 미래산업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폭넓게 나눴다. 이 자리에는 SK하이닉스 곽노정 사장 등 양사 경영진도 함께했다.
박 부회장은 "국경과 산업을 초월해 글로벌 빅테크들과의 협력을 계속하겠다"며 "앞으로 시장을 이끌어가는 유수 기업들과 다방면에서 기술 기반 미래 성장동력을 발굴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나경수 SK지오센트릭 사장, 추형욱 SK E&S 사장, 박경일 SK에코플랜트 사장, 박원철 SKC 사장도 각기 글로벌 기업 경영진과 친환경 사업 확대 방안을 협의하거나 투자 업무협약을 맺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관계 형성에도 '데이터'가 필요해
인간관계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신뢰를 쌓이며 탄탄해진다. 최 회장은 기업의 신뢰 관계 형성도 이와 같다고 보고 있다. 기업·시장·국가와의 새로운 네트워킹을 위해서는 '데이터 경영'이 필수적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해 관계자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돌아보고, 무엇을 하면 좋을지 데이터를 기반으로 고민해 관계를 쌓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데이터는 재무다. 지난 10월 제주도에서 열린 '2022 CEO세미나' 폐막 연설에서 최 회장은 "경영환경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데이터 기반의 경영전략 실행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진단하며 데이터를 다루는 각 사 최고재무책임자(CFO)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작년 말 인사에서 CFO 출신 인사들의 승진이 눈에 띄었던 것도 이 일환으로 풀이된다. 대표적으로 그룹 지주사이자 투자전문회사 SK㈜에서는 이성형 CFO가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와 동시에 SK㈜는 CFO 역할을 강화해 재무구조와 사업 포트폴리오 최적화 및 관리 기능을 총괄하도록 했다. CFO는 재무관리뿐 아니라 사업 시너지 제고 등 종합적 관점에서 CEO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결국은 행복, 결국은 ESG
최 회장이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결국 '행복'이다. 그는 수년간 줄기차게 '행복론'을 외쳐왔다. 올해 역시 가장 중요한 과제를 구성원들의 행복으로 꼽았다. 그는 "새해에는 구성원 곁에 다가가 함께 행복을 키우는 기회를 늘리고 구성원의 목소리가 경영에 반영되는 시스템을 계속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최 회장이 인류의 문제에 집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기후변화, 질병, 빈곤 등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기업이 앞으로 인류의 선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기업 중 SK가 유독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집중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구성원들의 행복을 위한 최 회장의 발걸음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SK그룹 계열사는 올해 'ESG 경영 내재화'를 목표로 내세웠다.
김준 SK이노베이션 부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ESG 경영철학의 내재화를 당부했다. 김 부회장은 "ESG 중에서도 '카본 넷 제로(Carbon Net Zero)'는 지속가능한 성장과 글로벌 이해관계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한 핵심"이라며 "올해도 넷제로 실행이 지속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 탄소 감축 노력을 강력히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장동현 SK㈜ 부회장는 신년 영상메시지를 통해 "사업 포트폴리오 성과를 되짚어 보고 가치를 더욱 키우는 기회를 만들어 가는 한편, ESG 경영체계를 내재화해 지속가능한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