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수요 둔화 속에서 실적 저점을 확인한 국내 배터리 3사가 공장 증설 경쟁 대신 연구개발 강화와 사업 구조 다각화로 전면적인 체질 개선에 나섰다.
올해 1분기 시장 우려보다 선방한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건설로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겨냥, 공장 라인을 에너지저장장치(ESS)용으로 전환하고 하이브리드 차량용 배터리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시장 변화에 맞춘 유연한 생산 체계 구축이 생존의 핵심 변수로 부상한 가운데 하반기부터 미국의 보조금 혜택과 대중 관세 효과가 본격화되면서 고부가 제품 중심의 사업 재편 성과가 실적 반등을 이끌 전망이다.
북미 ESS 시장 선점과 제품군 다변화 총력
27일 각사 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은 올해 1분기 연구개발비로 전년 동기보다 10.7% 늘어난 3403억원을 투입하며 미래 기술력 확보에 공을 들인 모습이다.
특히 급증하는 북미 전력망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LG에너지솔루션은 제너럴모터스(GM)와의 합작법인인 얼티엄셀즈 테네시 공장의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라인 일부를 ESS 라인으로 전환했다. 빅테크 기업들의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건설로 백업 전원 수요가 폭발하자 공정 유연성을 발휘해 매출 공백을 메우겠다는 전략이다.
이번 라인 조정에는 총 7000만 달러(약 1050억원)가 투입됐으며 전기차 라인 가동 축소로 일시 휴직 중이던 직원 700명을 ESS용 리튬인산철(LFP) 생산 현장에 전면 재배치했다. 여기서 생산한 ESS 전용 셀은 자회사인 LG에너지솔루션 버텍을 통해 북미 전력망 프로젝트에 곧바로 공급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올해 전 세계 ESS 생산 능력을 60GWh 이상으로 확대하고 북미 지역에서만 20GWh(기가와트시) 이상의 수주를 달성할 계획이다.
삼성SDI는 배터리 업황 둔화기에도 연구개발 투자를 대폭 늘리며 기술 프리미엄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올해 1분기 삼성SDI가 집행한 연구개발비는 435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21.8% 급증했다.
2027년 양산 예정인 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제품 고도화에 투자를 집중하는 한편 전기차 수요 둔화에 따른 매출 공백은 빅테크 기업을 겨냥한 대용량 ESS 시장 확대로 메우고 있다.
삼성SDI는 배터리 셀과 모듈을 컨테이너 박스 형태로 일체화한 대형 ESS 솔루션인 '삼성 배터리 박스(SBB)' 라인업을 앞세워 북미 시장을 집중 공략 중이다. 에너지 밀도를 극대화하고 화재 방지 기술을 강화한 프리미엄 제품 'SBB 1.7'과 보급형 전력망 시장을 타깃으로 한 리튬인산철(LFP) 기반의 'SBB 2.0'을 교차 투입하는 투트랙 전략으로 빅테크 고객사들을 확보하고 있다. 삼성SDI는 이 같은 고부가 라인업 다변화를 통해 기존 3조원대 수준이던 ESS 부문 매출 규모를 올해 50% 이상 끌어올릴 방침이다.
반면 SK온은 긴축형 연구개발 기조를 택한 모습이다. 실제 SK온의 올해 1분기 연구개발비용은 651억원으로, 지난해 동기보다 16% 감소했다. 배터리 3사 중 유일하게 연구개발 투자 규모를 줄인 것으로, 전방 산업 위축에 대응해 현금 흐름을 확보하고 내실을 다지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해외 생산 시설의 증설 속도를 조절하는 한편 하이브리드(HEV) 차량용 원통형 배터리와 전력망용 ESS처럼 즉각적인 매출 창출이 가능한 부문으로 자원을 재배치하고 있다.
전력망 사업에서는 실제 매출로 이어지는 성과를 거뒀다. SK온은 지난 2월 전력거래소가 주관한 제2차 ESS 중앙계약시장 경쟁입찰에서 총 발주 물량의 절반인 50.3%에 달하는 284MW(메가와트)를 확보했다. 지난해 진행된 1차 입찰에서 수주 실적을 전혀 내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전력망 사업 부문에서 안정적인 중장기 매출 기반을 채운 셈이다. SK온은 전기차 시장의 회복 지연에 대응해 당분간 하이브리드와 정부 주도 전력망 물량을 중심으로 업황 전환기를 지나겠다는 방침이다.
中공세와 원가 격차 극복 과제
국내 배터리 3사가 실적 방어 카드로 내민 ESS 시장은 중국 업체들이 압도적인 점유율로 판을 장악하고 있어 진입 장벽이 높은 상태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ESS 시장 내 중국의 비중은 60%를 웃돈다. 중국 정부가 신재생에너지 발전 단지에 ESS 설치를 사실상 의무화하면서 자국 내 수요만 2024년 기준 205GWh에 달해 전체 시장의 64%를 독식했다. 반면 중국 시장 안에서 한국산 배터리의 입지는 1% 미만이다.
국내 업계의 핵심 타깃인 미국 시장에서도 중국의 공세는 거세다. 지난해 미국 ESS 배터리 시장에서 CATL, BYD, EVE에너지 등 중국 주요 기업들의 점유율은 72%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업체는 포드에 배터리 기술 라이선스를 제공하거나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규제를 우회하며 북미 영향력을 넓히는 중이다. 리튬인산철(LFP)과 각형 배터리 중심으로 재편된 ESS 시장에서 후발주자인 국내 기업들이 중국 현지의 압도적인 공급망을 기반으로 한 제조 원가 격차를 단기간에 좁히기는 쉽지 않은 구조다.
다만 최종 판매 가격 측면에서는 미국의 보조금 지급과 대중 관세 부과가 본격화되는 올해 하반기부터 국내 업계가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과 현지 생산 체계 안착이 중국의 가격 공세를 차단하는 변수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주민우 NH투자증권 연구원은 "2차전지 업황은 실적 다운사이클을 지나 해가 떠오르기 전 하늘이 환하게 밝아오는 새벽녘 시간을 지나고 있다"며 "1분기 실적 설명회를 기점으로 연간 실적 전망치 하향 조정은 마무리됐고 유럽의 전기차 판매 회복과 미국의 재고 정상화, ESS 수요 확대가 실적 반등을 이끌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시장 일각에서 제기되는 ESS 공급과잉 우려에 대해 주 연구원은 미국 현지 시장의 제도적 특성을 들어 기우라고 봤다. 북미 ESS 고객사들이 투자 금액의 30%에서 최대 50%까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는 투자세액공제(ITC) 적격 물량을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NH투자증권 리서치본부 전망에 따르면 미국의 ESS 수요는 올해 115GWh에서 2027년 149GWh, 2028년 186GWh로 급증하는 반면 미국 정부의 자급 요건을 충족하는 현지 적격 생산능력은 올해 94GWh, 내년 134GWh 수준에 머무를 것으로 관측된다. 이에 따라 수요 대비 적격 공급량을 나타내는 미국 내 적격 공급률은 올해 82%, 내년 90%로 추산돼 여전히 공급이 수요를 밑도는 공급 부족 상태가 이어질 전망이다.
주 연구원은 "적격 공급의 부족분을 현재 중국산 제품이 채우고 있으나 미국 현지 생산 시 배터리 셀 기준 kWh(킬로와트시)당 45달러에 달하는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혜택과 최대 50% 수준의 ITC 혜택, 여기에 최소 28.4%에서 38.4%까지 부과되는 미국의 대중 관세를 고려하면 북미 시장 내에서 중국산 배터리의 최종 가격 경쟁력은 사실상 상실된다"고 짚었다.
최근 국내 기업들의 ESS 수익성 우려에 대해서도 "다수의 생산 거점을 동시에 가동(램프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시적 현상"이라며 "하반기 중 현지 생산 병목 현상이 해소되고 고정비 부담이 완화되면서 ESS 부문의 분기 흑자 전환이 유력하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