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롯데의 석유화학 빅딜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승부근성이 새삼 확인되고 있다. 신 회장은 형인 신동주 롯데홀딩스 전 부회장과 경영권 분쟁 속에서도 국내 화학업계 최대인 3조원대의 빅딜을 성사시켰다. 신 회장은 이번 결정으로 그룹의 사업포트폴리오를 강화하고, 자신이 롯데를 이끌어야하는 명분을 동시에 챙겼다.
◇ "경영과 가족은 별개" 과감한 승부수
"경영환경이 좋지 않아도 미래를 위한 투자를 아껴서는 안된다."
올해 초 롯데가 역대최대 규모의 투자를 결정할 때 신 회장은 이 같은 말로 임원들에게 적극적인 사업확대를 주문했다. 롯데는 곧바로 국내 1위 렌털업체인 KT렌탈를 인수했고, 130여년 역사를 지닌 미국 뉴욕 팰리스 호텔을 사들였다.
인천공항 면세점 입찰에서도 다른 경쟁사들을 제치고 대기업에 배정된 전체 8개 권역 가운데 절반인 4개를 낙찰받았다. 롯데가 인천공항 면세점을 따려고 써낸 가격만 6조원대에 달한다.
신 회장은 지난 7월 형제간 경영권 분쟁이 표면화되기 전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을 만나 빅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형제간 다툼이 고조되면서 불확실성이 커지기도 했으나 신 회장 자신이 확고한 의지를 갖고 거래를 성사시켰다.
그는 "경영과 가족의 문제는 분리해야 한다"며 형제간 다툼이 경영차질로 이어져선 안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매각자인 삼성을 고려해 "서비스업의 삼성전자가 되겠다"며 삼성에 대한 호감을 우회적으로 표시하기도 했다. 이번 빅딜에 대한 신 회장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제2전성기 꿈꾸는 신동빈, 화학사업 강화
재계 5위인 롯데는 유통과 식음료, 관광레저 분야 매출이 그룹 전체매출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롯데케미칼, 대산엠엠에이, 씨텍 등 화학분야 매출비중은 25%에 불과하다. 이번 인수로 롯데그룹에서 차지하는 화학매출 비중은 30% 가까이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그간 롯데의 화학사업은 범용제품 생산에 치중해 업황변동에 따라 실적이 크게 좌우되는 약점을 지녔다. 이번에 삼성이 생산하던 고부가가치 제품을 수직계열화함에 따라 화학분야의 경쟁력 강화가 기대된다고 롯데측은 설명했다.
이번 빅딜은 신 회장 개인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신 회장이 1990년 한국 롯데 경영에 처음 참여한 회사가 롯데케미칼(당시 호남석유화학)이다. 지난 7월15일 일본롯데홀딩스의 대표를 맡은 뒤 첫 현장경영 활동도 롯데케미칼에서 시작했다.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이 유통과 식음료, 관광레저 등 주로 유통과 서비스 분야에서 '롯데왕국'을 이뤘다면 신 회장 본인은 막대한 설비투자를 기반으로 한 중후장대형 사업영역에서 제2의 롯데 전성기를 꿈꿔왔던 셈이다. 롯데 관계자는 "이번 인수건은 신 회장의 제안에 따라 진행됐다"며 "그동안 그룹의 석유화학사업에 대한 신 회장의 애정은 여러 차례 확인됐다"고 말했다.
◇ '위임장뿐…' 위축되는 신동주
이번 빅딜은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에서 신 회장이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재계에서는 아버지의 위임장을 앞세워 승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형(신동주)의 입지가 경영성과를 내세우는 동생에게 밀려 더욱 위축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신 회장은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롯데정책본부장에 취임할 당시(2004년) 23조이던 그룹 매출을 80조원 이상 키웠고, 이 기간 중 국내외에서 30여건의 인수합병을 성사시키며 롯데그룹의 몸집을 불렸다. 신 회장의 이 같은 경영능력은 형제간 경영권 분쟁에서 한일 롯데 임직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주요 명분이 됐다. 롯데가 이번에 삼성으로부터 화학사업을 인수하는 가격은 3조원대로 롯데그룹 M&A 역사상 가장 큰 규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