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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스토리]KT&G의 '절묘한' 생존 전략

  • 2019.06.12(수) 10:11

전자담배 후발주자지만 전체 시장점유율 되레 상승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담배 한 개비 분량을 사용할 때마다 진동으로 알려주는 방식.', '슬라이드를 내리면 바로 작동해 첫 모금부터 풍부한 느낌.'

KT&G가 지난달 액상형 전자담배인 '릴 베이퍼'를 출시하면서 내놓은 홍보 문구입니다. 릴 베이퍼는 '폐쇄형 시스템(Closed System Vaporizer·CSV)' 형태의 제품인데요. 액상 카트리지를 사서 기기에 결합하기만 하면 바로 흡연할 수 있는 간편한 방식으로 주목받는 담배입니다. 최근 한국에 진출해 이슈가 됐던 미국의 '쥴'이 바로 이런 형태의 전자담배죠.

그런데 KT&G가 내놓은 문구는 릴 베이퍼를 홍보하는 동시에 경쟁사 제품인 쥴을 겨냥하는 내용이기도 해 눈길을 끕니다. 쥴은 진동 기능이 없어 본인이 얼마나 흡연을 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게 단점으로 꼽히기도 하는데요. 아울러 첫 모금의 흡연감이나 연무량이 다소 부족한 면이 있는데, 릴 베이퍼는 첫 모금 전에 미리 기기가 작동하도록 해 이런 '단점'을 보완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후발주자만 할 수 있는 전략입니다. 쥴은 이미 미국 전자담배 시장을 70%가량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많습니다. 당연히 우리나라 담배시장에 진출할 가능성도 높았는데요. 덕분에 KT&G는 쥴의 '단점'을 보완한 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릴 베이퍼는 쥴의 국내 진출에 맞춰 부랴부랴 만든 제품일까요? KT&G는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KT&G는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전자담배에 대한 연구·개발을 진행해왔고, 시장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쥴이 미국에서 이미 인기를 끈 데다 국내 진출까지 예상되니 이에 맞춰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고, 쥴이 시장을 선점하지 못하도록 출시 시기를 맞춘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2017년 6월 필립모리스의 아이코스가 국내에 첫 진출할 당시에도 사실 KT&G는 릴을 이미 만들어 놓고 있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입니다. 실제로 릴이 출시된  건 5개월이 지난 2017년 11월이었는데요. 아이코스 출시 당시에는 국내에 궐련형 전자담배 관련 과세 기준조차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외국계 담배 회사인 필립모리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품을 출시했지만, 과세당국의 눈치를 봐야 했던 KT&G는 섣불리 출시하기가 어려워 대응이 늦어졌다고 합니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결국 궐련형 전자담배 시장은 아이코스가 선점했는데요. 아이코스의 점유율은 60~65%에 달하는 반면 릴은 20~25%가량에 그치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서 릴의 점유율이 30%까지 올라가긴 했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 격차가 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번 '액상형 전자담배' 경쟁에선 나름 '신속하게' 대응했으니 쥴에 밀리지 않을 것이란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KT&G가 다양한 전자담배 제품들을 곧장 내놓을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도 왜 외국업체들이 들어온 뒤에야 뒤늦게 선보이고 있는 걸까요? 미리 시장 선점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아이코스의 등장으로 국내에 처음 궐련형 전자담배 시장이 열릴 당시만 해도 업계에선 KT&G가 일부러 릴에 대한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기존 영업망을 활용하면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을 텐데 예상보다 더디게 대응하고 있다는 겁니다.

궐련형 전자담배는 기존 일반담배 흡연자들이 이용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내 일반 궐련 담배시장에서 1위를 하고 있던 KT&G 입장에선 굳이 전자담배 시장을 키울 이유가 없다는 분석이 많았습니다. 섣불리 전자담배 시장을 키웠다가 기존 일반 궐련 담배시장에서 벌어들이고 있던 수익은 줄고, 게다가 전자담배 시장에서 아이코스에 밀린다면 그야말로 화를 자초한 꼴이 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들여다보니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국내 일반 궐련 담배시장 규모가 다소 줄긴 했지만 KT&G의 점유율은 되려 높아진 겁니다. 궐련형 전자담배 시장에서도 점차 점유율을 높이고 있고요. 결국 KT&G 입장에선 기존 시장에서도, 새로운 시장에서도 좋은 결과가 나오고 있는 건데요.

국내 일반 궐련 담배시장에서 KT&G의 점유율은 아이코스 출시 직후인 지난 2017년 4분기 59.6%에서 올해 1분기 63.1%로 높아졌습니다. KT&G가 점유율 63%를 넘긴 건 10년 만에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기존 흡연자 중 전자담배로 이동한 이들이 '외국산 담배 이용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외국산 담배를 즐겨 피던 이들은 주로 젊은 층일 텐데요. 이들이 궐련형 전자담배로 넘어간 경우가 많았던 겁니다. 아이코스뿐만 아니라 릴도 포함해서요. 결국 KT&G는 기존 일반 담배 고객은 덜 뺏기면서, 외국산 담배 이용자들을 릴을 통해 끌어들인 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KT&G가 이번에는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쥴의 국내 출시에 딱 맞춰 제품을 내놓으며 맞불을 놓은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또 국내 편의점 업계 1위인 CU와 제휴해 판매량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CU 매장에서 릴 베이퍼의 발주 횟수를 두 배로 늘렸다고 합니다.

물론 청소년 흡연 우려 등으로 정부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 공개적인 마케팅은 다소 자제하고 있는 듯하지만, 이번에는 KT&G가 일부러 영업을 소극적으로 하고 있다는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과연 액상형 전자담배 시장에 얼마나 성장할지, 그리고 쥴과 릴 베이퍼의 대결에서 누가 승기를 잡을지 이런 관점에서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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