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의 첫 기사
지난 9월 20일, 남궁현 현대백화점 상품본부 식품사업부 H&B팀 주류총괄 바이어가 프랑스 보르도 생떼밀리옹에 도착한 날은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남궁현 바이어는 "새벽 1시에 간신히 도착했는데 호텔마저 정전이었다"며 "핸드폰 플래시 켜고 샤워하면서 '하늘이 오지 말라고 막는 건가' 싶었다"고 회상했다.
다음날인 일요일에도 비가 그치지 않았다. 그래도 생떼밀리옹의 한 성당에서는 무사히 미사가 열렸다. 이날 미사는 특별했다. 820년 역사의 프랑스 와인 기사 작위 '쥐라드 드 생떼밀리옹(Jurade de Saint-Emilion)'의 수여식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작위 수여식은 평소라면 야외 정원에서 열려야 했을 행사였다. 하지만 올해는 비 때문에 성당 안의 경건한 분위기에서 6시간 가량 이어졌다. 작위 수여자들은 빨간 망토를 입고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 올해는 전 세계에서 29명의 와인 관계자들이 작위를 받았다. 이들이 한명씩 소개됐고 그때마다 박수가 터져나왔다. 수여식에서는 견장과 액자에 넣은 임명장을 선물로 줬다. 남궁 바이어는 "빨간 망토를 입고 나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며 "제 이름이 불려 나갔을 때 박수를 받았는데 굉장히 뿌듯했다"고 말했다.
쥐라드 드 생떼밀리옹은 부르고뉴의 '슈발리에', 메독의 '코망드리'와 함께 프랑스 와인업계 최고 권위의 기사단으로 꼽힌다. 전 세계 수여자는 약 3000명 정도다. 한국에서는 대형마트 바이어 등이 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백화점업계에서는 그가 최초다.
60만병 판 비결
남궁현 바이어가 프랑스 와인 기사 작위를 받은 것은 다양한 종류의 프랑스 와인을 국내에 소개한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남궁 바이어가 현대백화점에 합류한 건 3년 전인 2022년이었다. 당시 현대백화점은 남양주 다산신도시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스페이스원(SPACE1)에 국내 첫 대규모 와인 아울렛 '와인리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20년 가까이 와인업계에서 일해온 그는 와인리스트 오픈을 위해 현대백화점에 스카우트 됐다.
이후 와인리스트를 비롯해 현대백화점의 와인 복합 매장 '와인웍스' 등을 통해 500여 종의 프랑스 와인을 국내에 소개해왔다. 그가 2022년 입사 이래 지난 8월까지 3년 3개월간 현대백화점에서 판매한 프랑스 와인은 60만병에 달한다. 매달 1만5000병씩 판 셈이다.
남궁 바이어가 와인을 선보이는 전략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올해 4월 압구정 본점 와인웍스 내에 선보인 '프리미엄 글라스 와인 바'다. 이곳에서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모두 병당 200만원을 훌쩍 넘는 5대 샤토를 글라스 단위로 즐길 수 있다. 와인 숍과 다이닝을 하나로 합친 와인웍스 매장을 한 단계 더 진화시킨 실험이었다.
남궁 바이어는 "보르도 메독 지방에는 5개의 1등급 와인이 있는데 통칭 '5대 샤토'라고 부른다"며 "병으로 사마시기엔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와인 애호가들이 오늘은 이 와인을, 내일은 저 와인을 맛볼 수 있도록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한 잔 가격은 10만~15만원 선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오픈 이후 현재까지 약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글라스 와인 바를 이용했다. 단순 계산으로만 1억원이 훌쩍 넘는 매출이다. 그는 "고가의 와인을 매입해 따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보니 와인웍스를 운영하는 계열사 현대그린푸드를 설득하는 게 처음엔 가장 어려웠다"면서 "'만약에 안 팔리면 내가 와서 다 마시겠다'고 했다"며 웃었다. 이어 "다행히 압구정 본점 주류 담당 신입 사원이 아주 열정적으로 도와줬다"며 "그 친구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더 중요한 것은 재방문율이 높다는 점이다. 그만큼 만족도가 높다는 의미다. 그는 "한번 경험해 본 분들이 계속 찾아온다"면서 "오늘은 이걸 마셔보고 내일은 저걸 마셔보면서 5대 샤토를 다 비교해보시는 분들도 계신다"고 설명했다.현대백화점은 이달 중 무역센터점 와인웍스를 시작으로 더현대서울 등으로 글라스 와인 바를 확대할 예정이다. 남궁 바이어는 "꼭 100만원대가 아니어도 30만~40만 원대 와인도 맛볼 수 있도록 준비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사실 남궁 바이어의 업무는 와인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현대백화점의 주류 사업 전반을 총괄하고 있다. '팝업의 성지'로 불리는 더현대서울의 다양한 주류 팝업 스토어들도 남궁 바이어의 손을 거치고 있다. 그는 "단순히 물건만 파는 시대는 지났다"며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려면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선착순으로 와인·위스키 클래스를 열거나 시음 기회를 주고 팝업스토어에서 칵테일을 만들어 선보이는 이유"라면서 "이런 경험들이 백화점의 새로운 가치"라고 덧붙였다.
생떼밀리옹 전도사
이제 남궁 바이어에게는 프랑스 와인 기사로서 새로운 임무도 주어졌다. 바로 생떼밀리옹 지역 와인의 홍보대사의 역할이다. 생떼밀리옹은 보르도의 한 지역이다. 그런데 보르도의 또 다른 와인 생산지인 메독에 비해 생떼밀리옹의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낮다. 그는 "메독 지역에는 유명한 5대 샤토가 있어서 인지도가 높지만 생떼밀리옹은 조금 덜 알려져 있다"며 "하지만 생떼밀리옹 와인이 실제로는 한국 음식과 훨씬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포도 품종에 있다. 메독 지역은 '카베르네 소비뇽'이 주 품종이다. 타닌이 강해 떫은맛이 센 편이고 숙성 기간을 거쳐야 부드러워진다고 한다. 반면 생떼밀리옹은 '메를로' 품종이 주를 이룬다. 그는 "메를로는 부드럽고 편하게 마실 수 있는 품종이라 바로 오픈해서 마셔도 좋고 매운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면서 "삼겹살, 돼지고기, 갈비, 갈비찜 같은 양념이 진한 한식과 찰떡궁합"이라고 설명했다.
남궁 바이어는 수여식 이후 현지 와이너리들과 미팅을 갖고 이미 몇 가지 생떼밀리옹 와인을 선정해왔다. 그는 "내년에 생떼밀리옹 와인을 더 선보일 예정"이라며 "단순히 판매만 하는 게 아니라 소믈리에들을 모아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거나 일반인들 대상으로 무작위 시음회를 열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남궁 바이어가 최근에 마신 와인 중 가장 맛있는 와인은 무엇일까. 그는 작위 수여식 만찬에서 마신 매그넘(1500㎖)병의 '샤또 발랑드로 2020'가 특히 인상 깊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일반 750㎖ 병을 구할 수 있다. 남궁 바이어는 "그날 모든 테이블에서 난리가 났을 정도였다"면서 "정말 맛있고 황홀했던 경험이었다"고 평했다.
와인 너머로
하지만 그가 활동하는 와인 시장의 환경은 녹록지 않다. 전 세계적인 불황인데다, 젊은 세대일수록 술을 덜 마시는 경향이 생기면서 와인 시장 자체가 침체돼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궁 바이어는 와인 시장의 미래를 낙관한다. 그는 "일본은 와인 문화가 훨씬 더 대중화돼 있다"며 "한국도 결국은 그 방향으로 갈 텐데 다만 형태가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캔 와인, 와인 칵테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주류가 등장하고, AI 소믈리에가 개인 맞춤형 추천을 해주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온라인 주류 판매가 합법화되면 제2의 전성기가 올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젊은 세대가 술을 덜 마시긴 해도 또 다른 기회 요인이 있다고 본다. 남궁 바이어는 "젊은 세대는 한번 마실 때 더 맛있게, 제대로 마시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전략은 '다각화'다. 와인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주류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남궁 바이어의 개인적인 경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MD를 하면서 와인 외에도 위스키, 맥주, 사케, 전통주까지 모든 주류를 다룬 것이 나에게는 전환점이었다"며 "와인만 했다면 재미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때는 데킬라가 미국에서 난리였고 지금은 사케와 꼬냑이 핫한 것처럼 세계 주류 시장은 계속 변한다"면서 "트렌드에 맞춰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2027~2028년에 오픈하는 더현대광주, 더현대부산과 같은 주요 점포에 전통주 전문관을 만들려고 한다"며 "단순히 술을 팔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전통주 소믈리에를 두거나 전용존을 만드는 시도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현대백화점에 가면 와인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주류를 다 경험할 수 있다는 걸 재미있게 보여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3대 기사 작위를 모두 받는 것이 목표다. 그는 "실제로 세 작위를 다 받는 게 가능한지 여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욕심은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와인이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물었다. 남궁 바이어는 "그냥 열정인 것 같다"며 "와인업계에서 일해온 지난 21년간 정말 열심히 일했고 재미있게 일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 할 일이 너무 많다"면서 "이 열정이 60세까지는 계속되지 않을까 한다"며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