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와 설탕이 '물가 안정'을 외치는 정부의 1순위 타깃이 됐습니다. 검찰이 밀가루·설탕업체들의 임직원 수십명을 담합 혐의로 기소한 데 이어 국세청까지 세무조사에 나서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는데요. 이재명 대통령까지 나서 밀가루·설탕 담합 기업에 대한 엄정 대처를 주문하기까지 했죠.
정부가 이들 품목을 집중 타깃으로 삼은 건 서민 물가와 직결돼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밀가루와 설탕은 소수 기업이 시장 90% 이상을 장악하고 수십년간 담합을 반복하고 있는데요. 문제는 그 피해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드러난 짬짜미
서울중앙지검이 지난 2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대한제분·사조동아원·CJ제일제당·삼양사·대선제분·삼화제분·한탑 등 제분사들은 지난 2020년 1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5년 9개월간 가격을 담합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국제분협회를 통해 조직적으로 밀가루 가격과 출하량을 조정했다고 하는데요. 이 기간 밀가루 가격은 최대 42.4%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담합 규모는 무려 5조9913억원에 달합니다.
CJ제일제당과 삼양사 등 주요 제당사들 역시 2021년 2월부터 2025년 4월까지 4년간 가격 인상 시기와 폭을 맞춘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 시기 설탕 가격은 최대 66.7% 급등했고요. 총 담합 규모는 3조2715억원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들의 담합 방식에서 드러난 건 치밀한 조직성이었습니다. 제분사들은 '사다리타기'로 최초 가격 인상 제안 업체를 정했습니다. 먼저 나서서 가격을 올리는 리스크를 나누기 위해서였죠. 제당사들의 경우 원당 가격이 오를 때는 설탕 가격을 즉각 올렸지만 원당 가격이 떨어질 때는 인하를 최소화하며 차익을 챙겼습니다. 검찰은 이들을 '서민경제 교란사범'이라고 칭하기까지 했습니다.
검찰뿐 아니라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칼 끝도 제분사와 제당사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국세청은 지난 1월 설탕 담합업체들에 대한 세무조사를 단행한 데 이어 최근 밀가루 가격을 담합한 대한제분에 대한 추가 세무조사까지 실시했고요. 공정위 역시 지난해부터 이들 담합 기업에 대한 별도 조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제분사와 제당사들은 잇따라 백기를 들었습니다. 대한제분·CJ제일제당·사조동아원은 줄줄이 밀가루·설탕 가격을 평균 5% 가량 인하겠다고 발표했죠.
서민 직격
이렇게 담합이 가능했던 건 밀가루와 설탕 시장의 과점 구조 때문입니다. 설탕은 CJ제일제당·삼양사·대한제당 3개사가 시장의 93.9%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밀가루는 대한제분·사조동아원·CJ제일제당 3개사가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죠.
이런 과점 구조가 유지되는 건 밀가루와 설탕 시장의 진입장벽이 높기 때문입니다. 밀가루 공장 하나 짓는 데만 수천억원이 들어갑니다. 원료인 밀과 원당은 100% 수입에 의존하는데 카길·ADM 같은 해외 곡물 메이저들과 거래 관계를 맺는 것도 쉽지 않죠. 여기에 전국 유통망까지 구축하려면 초기 투자가 조 단위로 커집니다. 돈이 많아도 쉽게 뛰어들 수 없는 구조라서 1990년대 후반 형성된 과점 구조가 30년 가까이 흔들리지 않은 겁니다.
이렇게 과점 구조인 시장은 담합을 유지하기에도 쉽습니다. 원래 담합은 깨지기 쉽습니다. 담합 약속을 어기고 가격을 낮춰 고객을 독점하려는 유혹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담합 참여 기업이 적은 과점 시장의 경우 서로 감시하기가 쉽습니다. 누가 약속을 어기는지도 금방 찾아낼 수 있죠. 실제로 제분사들은 상호 실사로 담합 합의를 지켰는지 점검하고 협회를 통해 조직적으로 관리했다고 합니다.
밀가루와 설탕 가격 담합이 문제인 것은 2차 가공식품 가격을 연쇄적으로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밀가루와 설탕은 라면·빵·과자 등의 핵심 원재료입니다. 이번 검찰 조사에 따르면 제당사와 제분사가 담합한 기간 동안 농심, 오뚜기, 파리바게뜨 등이 잇따라 가격을 올렸습니다. 원재료 담합이 소비자 장바구니를 직격한 겁니다. 밀가루와 설탕이 정부의 집중 타깃이 된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담합은 처음도 아닙니다. 밀가루와 설탕 가격을 최초로 담합한 사건은 1963년 '삼분폭리사건'인데요. 10여 개 제분업체가 가격을 담합하면서 밀가루·설탕·시멘트 가격이 고시가격의 3~4배까지 폭등한 사건입니다. 당시 이들 제분업체가 취한 폭리가 100억원 이상이었다고 하죠. 국내에서 처음으로 기업의 독과점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으로 이후 공정거래법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밀가루와 설탕 담합이 또 논란이 됐습니다. 제분사들은 2001년부터 5년간 조직적으로 생산량과 가격을 담합한 사실이 2006년 공정위에게 적발됐습니다. 당시 소비자 피해액은 무려 4000억원으로 추산됐죠. 심지어 중간 소비자인 삼립식품이 밀가루 담합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제분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공정위가 이들에게 부과한 과징금은 총 434억원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법상 최고한도액이었다고 하네요. 제당기업들의 경우 1991년부터 2005년까지 15년간 출고량과 가격을 담합한 것이 2007년 드러났습니다. 공정위는 이들에게 51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습니다.
이번에는 다를까
하지만 이런 과징금조차 이들의 담합을 막지 못했습니다. 처벌보다 수익이 훨씬 컸기 때문이죠. 2006년 밀가루 담합 사건 때 과징금은 소비자 피해액 4000억원의 10% 수준인 434억원에 그쳤습니다. 담합으로 벌어들인 돈에 비하면 과징금은 '사업 비용' 정도였던 셈입니다.
공정거래법 위반 시 법정형이 낮다는 점도 문제로 지목됩니다. 개인이 형사처벌을 받았을 때 3년 이하 징역 또는 2억원 이하 벌금에 그치는데요. 징역 10년 이하 또는 100만 달러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미국, 징역 5년 이하 또는 무제한의 벌금에 처하는 영국 등과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검찰 역시 이번 담합 사건을 기소하면서 담합 범행을 실행한 개인에 대한 법정형을 상향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국내에는 담합을 깨뜨리기 위한 장치인 리니언시 제도도 운영 중이지만 이 역시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리니언시 제도는 담합을 자진신고 할 때 과징금을 감면해주는 제도를 말하는데요. 담합 참여자들끼리 서로 배신하게 만들어 적발을 쉽게 하려는 의도죠.
실제로 2006년 밀가루 담합 때 CJ제일제당은 자진신고로 과징금을 전액 면제받았고 삼양사는 50% 감면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2021년 설탕 담합으로 다시 구속 기소됐습니다. 자진신고로 처벌을 피한 뒤 다시 담합에 가담한 겁니다.
정부는 이번에는 과징금만 물리던 것에서 벗어나 형사처벌을 강화하고 담합 실행자 개인에 대한 처벌을 확대하겠다고 하는데요. 이재명 대통령이 과징금 감면 규정을 즉각 개정하라고 압박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구조적 한계는 여전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과징금을 올리고 법정형을 높여도 과점 구조가 유지되는 한 담합 유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전방위 압박이 60년 담합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