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대출 동향과 건전성 현황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지만, 대출 규제의 미세조정을 통해 대출 증가세를 억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거나 정한 사실은 없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9일 낸 보도 해명자료 내용 중 일부다.
최근 가계대출 급증에 따라 내년 업무계획에 가계대출 억제 카드를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정면으로 부인하는 자료를 냈다. 부동산 투기가 가장 심했던 2006년보다 가계대출이 더 가파르게 늘고 있는데도, 억제 카드는 검토조차 하지 않고 있다면서 스스로 직무유기를 인정하는 이상한 해명에 나선 셈이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눈치만 보고 있다. 기준금리 인하와 함께 부동산 대출 규제마저 풀면서 가계대출이 급증하고 있지만,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여전히 ‘초이노믹스’를 밀어붙이고 있는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주택담보대출 위주인 가계대출의 대부분이 사업자금이나 생활비로 쓰이면서 부동산 시장 활성화엔 도움이 되지 못하고, 되레 내수침체의 골만 더 깊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 10월, 11월 가계대출 증가 폭 사상 최대
지난 10월 중 은행과 비은행을 모두 포함한 예금취급기관의 가계대출 잔액은 730조 6000억 원으로 한 달 전보다 7조 8000억 원이나 늘면서 9개월 연속 증가했다. 월간 증가 폭으론 2003년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후 최대 규모다.
은행이 주택금융공사에 넘긴 모기지론 양도분 등까지 합산하면 사실상 월간 증가 폭은 무려 8조 4000억 원에 달한다. 부동산 투기가 정점에 달했던 2006년 11월 7조 1000억 원보다 1조 3000억 원이나 많다.
은행권만 살펴보면 올 11월 중 국내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이 6조 8670억 원이나 늘었다. 사상 최대를 기록한 10월의 6조 9373억 원엔 조금 못 미쳤지만 비슷한 수준으로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정부의 가계대출 관리 목표치도 이미 훌쩍 넘어섰다. 금융위는 가계부채 종합대책의 하나로 매년 가계부채 증가 폭을 경상성장률 수준으로 관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부는 지난해 예산을 짜면서 올해 경상성장률을 6.5%로 전망했다. 하지만 잇달아 전망치를 낮추면서 실제 올해 경상성장률은 5%에 안팎에 그칠 전망이다. 반면 가계대출은 올 들어 10월까지 43조 4000억 원 넘게 늘면서 지난해 말보다 6.3%나 늘었다.
◇ 가계대출 폭증하는데 금융당국은 눈치만
가계대출이 가파르게 급증하고 있는 이유는 최경환 부총리가 추진하고 있는 ‘초이노믹스’ 탓이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가 맞물리면서 가계대출 증가세가 갈수록 가팔라지고 있다.
금융당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겉으론 당장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실제론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다. 그런데도 쉽사리 부동산 대출 규제를 다시 조여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현 정부의 실세로 꼽히는 최 부총리가 여전히 금리인하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 카드를 고수하고 있어서다. 가계대출이 폭증하고 있는 만큼 내년 업무계획엔 대출 억제 방안을 당연히 검토해야 하는데도 굳이 검토 사실이 전혀 없다고 해명자료까지 낸 이유 역시 최 부총리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 입법조사차 “부동산 대출 규제 다시 조여라”
반면 우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10일 주택담보대출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다시 조여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대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서민 금융정책의 목표가 돼선 안 된다고도 꼬집었다.
지금처럼 가계대출이 늘어나면 정부가 의도하는 경기회복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대출 규제 완화로 풀린 돈의 상당수는 부동산 구입이 아니라 사업자금과 생활비로 쓰이고 있다. 그만큼 부실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그러면 결국 부동산 시장은 못 살리고, 가계 부실만 쌓이면서 내수회복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현재 우리나라 가계는 전체 부채가 연간 소득보다 1.3배 정도 많다”면서 “빚이 있는 소득 하위 20%는 원리금을 갚는 데 버는 돈의 68%를 쓸 정도로 가계부채 상황이 굉장히 심각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