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통해 금융기관에 5조2500억원을 풀었다. 이른바 '한국판 양적완화' 정책의 첫 행보다. 하지만 유동성을 주체하지 못한 은행들이 대거 한은에 돈을 맡기면서 양적완화 효과가 무색해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한은은 2일 오전 10시 은행과 증권사 등을 상대로 RP 91일물 매입을 실시해 총 5조2500억원을 공급했다고 밝혔다.
매입 한도를 두지 않고 응찰하는 금액 그대로 유동성을 공급한 첫 사례다. 자금사정이 빠듯한 증권사를 중심으로 입찰에 참가하려는 수요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한은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자금 경색 우려가 커지자 지난달 26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앞으로 3개월간 매주 1회 RP매입을 통해 시중의 유동성 수요 전액을 제한없이 공급하기로 했다.
무제한 RP매입은 1997년 IMF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 때도 시행하지 않았던 조치라 한국판 양적완화로 불린다. RP를 매입하면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효과가, 매각하면 유동성을 흡수하는 효과가 생긴다.
이날 RP매입을 통해 91일간 유동성을 공급하는 대가로 한은이 받기로 한 금리(모집금리)는 0.78%다. 기준금리(연 0.75%)보다 0.03%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당초 한은은 '기준금리+0.10%포인트'를 모집금리 상한으로 정하고 금리하한은 못박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입찰에선 91일물 RP매입 금리가 기준금리보다 낮게 형성돼선 곤란하다고 밝혔다.
한은 관계자는 "기준금리 미만으로 RP매입을 실시하면 실제 기준금리 인하 여부와 상관없이 시장에서는 금리인하 시그널로 오인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시중에 돈이 넉넉하게 풀리면서 자금을 주체하지 못한 금융기관이 한은에 뭉칫돈을 다시 맡기는 기현상도 나타났다.
이날 오후 2시 한은이 단기자금 수급 불균형 조절을 위해 실시한 RP 7일물 매각에는 금융기관이 무려 69조3400억원(응찰액)의 돈을 들고 찾아왔다. 근래 보기 드문 응찰액이다.
한은이 RP매각시 제시한 금리는 기준금리와 같은 0.75%였다. 이런 이자라도 받겠다고 금융기관이 입찰에 대거 참가한 것이다. 한은은 이 가운데 17조원(낙찰액)을 흡수했다. 그대로 놔두면 콜과 RP 등 단기금리가 기준금리 밑으로 급락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70조원 가량의 돈이 한은 앞에 줄을 선 건 시중에 돈이 이미 많이 풀려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한은은 증권사 유동성 공급을 위해 3조5000억원, 국고채 단순매입으로 1조5000억원 등을 공급했다.
특히 은행에 지급준비금을 초과하는 돈이 쌓이면서 은행들 사이에선 이 돈을 어떻게든 굴려야겠다는 심리가 크게 일었다.
은행 입장에서 지급준비금을 초과하는 돈은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노는 돈(idle money)'이다. 이 돈을 한은의 자금조정예금에 맡기는 방법도 있지만 현재 자금조정예금 금리가 0.00%라 활용가치가 없다.
한은 관계자는 "은행과 비은행의 자금수요가 달랐다. 특히 은행들은 초과 지급준비금을 줄이려는 욕구가 강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