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명가량의 직원이 사방이 탁 트인 공간에 모여 앉았다. 매주 한번씩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안건 중에는 특정 시간에 미팅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부터 성과평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회의는 두 시간이 넘어서도 계속됐다. 직원들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에 이승건 비바리퍼블리카 대표가 "제가 꺼낸 안건이 아니라 누가 건의를 한 것이라고요…"라며 말끝을 흐리기도 했다.
김태은 프로덕트오너(Product Owner, PO)는 NHN과 라인 등 유명 IT 기업에서 10여 년간 개발자로 일하다가 2016년 9월 비바리퍼블리카로 자리로 옮겼다. 잠재력과 가능성을 믿고 연봉과 복지도 포기했지만, 말로만 듣던 날것의 수평문화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주먹 두 개가 서로 부딪치는 그림에 '오가는 고성 속, 싹트는 아이디어' 식의 문구를 삽입한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었는데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대기업에서 일해왔던 터라 대표님에게 반기를 드는 것 자체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어요. 하지만 회의에 참석해 가감없이 자기 의견을 내는 직원들을 보면서 이 분위기에 녹아들지 않으면 여기서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쉽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태은 PO가 비바리퍼블리카로 옮긴 이유는 간단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할 수 있는 곳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조직은 조직장 위주로 일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는데, 데이터를 근간으로 일 자체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하겠다는 설명에 마음이 동했다.
"면접을 두 차례 거치면서 토스가 가진 잠재력을 볼 수 있었어요. 이렇게 일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죠. 집에 가서 아내에게 말했더니 회사가 말한 것 중 반만 지켜도 훌륭한 곳이라고 하더군요. 아이도 있고 부모님도 모셔야 했지만 지금 누리는 걸 포기하더라도 도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기업들은 애자일 조직이니 매트릭스 조직이니 하면서 사무실 칸막이를 없앴다가 다시 세우는 등의 실험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변화를 시도해 성공했다는 소식은 좀처럼 들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름에 '님'자를 붙여 부르게 했다가 분위기만 어색해져 '아예 말을 안 섞게 됐다'라는 웃픈 소식도 있다.
그래서 직원들이 자기 조직의 문화를 얘기하는 건 여전히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보란 듯이 기업문화를 자랑하는 비바리퍼블리카 직원들이 생소한 까닭이다. 일각에서는 '뽕 맞은 것 같다'라는 비아냥 섞인 조롱도 나오지만, 직원들이 그런 얘기를 스스로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난 6일 강남구 테헤란로에 위치한 비바리퍼블리카 사무실에서 금혜원 에디터, 김동민 PO, 김태은 PO 등 3명의 직원을 만났다. 사전에 서면 인터뷰를 실시한 뒤 이날 직접 만나 추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빠르게 성장하는 기업에서 자기의 목소리로 자기의 회사 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 "인생을 걸어봐"…"왜 인생까지?"
비바리퍼블리카 구성원들은 다른 직종에서 일하다가 경력직으로 옮겨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장이 가파르다 보니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 열명 남짓의 새 직원들이 끊임없이 입사하고 있다. 올해 출범 7년째를 맞는 토스의 현재 직원은 약 650여 명. 올해 중 800명을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김동민 PO는 2017년 합류 직전까지 홍콩계 증권사 CLSA에서 주니어 애널리스트로 일했다. 삼성전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미국 켈로그 경영대에서 MBA를 마쳤다. 더 늦은 나이가 되기 전에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 안정된 근무환경을 뒤로하고 토스행을 결정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새로운 직장을 고를 때 이걸 안 해봤을 때 나중에 혹시나 후회하지 않을까를 기준을 적용해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전 직장동료분이 토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인생을 걸어봐도 될 것 같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호기심에 찾아보니 유망하다는 평가가 있었고, 흥미가 생기게 됐어요."
그도 그럴 것이 회사에 인생을 걸겠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동민 PO 역시 "왜 인생까지 걸지?" 갸우뚱했다. 직접 지원을 했고 기세를 몰아 면접까지 봤다. 대화를 나누면서 '이렇게 스마트한 사람들이 모여 협업할 수 있는 직장이라면 적어도 석 달만 해봐도 인생에서 재미있는 경험이 되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었지만 처음에는 힘들었다. 비바리퍼블리카에 합류한 당시는 회사 주머니 사정이 궁해지면서 프로젝트 자금을 따오기 위해 서비스를 집중적으로 론칭하던 시기였던 탓이다. 그래도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팀원들의 성과가 모바일 앱 하나로 모아져 전체 성과로 이어지는 묘한 경험이었다.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담당하는 금혜원 에디터는 "조직문화 영상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라고 소개했다. 토스 로고가 새겨진 파란색 후드티를 입은 이승건 대표가 출연해 "인간은 누구나 일하기를 즐거워한다. 일하는 걸 방해하는 장애물만 걷어내주면 너무 열심히 일해서 몸을 망칠 수 있다"라면서 정곡을 찔렀다고 한다.
◇ 개인 평가 없다…성과는 토스 전체
직원 모두가 회사에 오너십을 갖고 하나가 되어 일을 한다는 건 멋진 일이다. 하지만 오너십이 지나치면 다른 직원들에게 오지랖을 부릴 수 있지는 않을까. 혼자 알아서 잘 하고 있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지적하면 자칫 하던 일도 하기 싫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김태은 PO는 데이터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AB테스트를 통해 한 상품이 시장에서 선택되는 걸 보면서 '그래도 이건 이렇게 해야 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데이터를 보고 검증을 하면서 이걸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합니다. 데이터를 보면서 억지 부릴 사람은 없거든요."
이승건 대표가 조직운영에서 강조해 온 것도 '완전한 정보 공개'다. 외부에서 투자를 얼마 유치했고, 지금 사내에 현금이 얼마가 남았으며, 어떤 계약이 눈앞에 있고 어떤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는지를 모두에게 공개한다. 구성원 모두가 회사 정보를 샅샅이 알고 있으니 결정을 내릴 때 기준이 명확하다.
금혜원 에디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저력은 유능한 사람이 모여있다는 데 있어요. 서로가 서로를 믿는 거죠. 토스의 코어밸류(핵심가치)에는 고객중심, 탁월함, 책임감, 상호존중, 사명감이 포함돼 있는데요. 이런 회사 방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가능하죠."
핀테크 최초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했음에도 다른 스타트업같이 휴가 제한이 없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출·퇴근 시간도 크게 제한이 없다. 모바일 앱 성과를 평가해 구성원 모두에게 같은 보너스와 연봉 인상률을 적용한다. 능력 있는 직원들을 고용하고 통제를 줄여 성과를 극대화한다는 이른바 '넷플릭스식 조직운영'이 떠오른다.
예전에는 여타 기업들처럼 개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일 년에 두 번 정도 평가했는데, 결과가 모두 좋게 나왔단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걸 서로 잘 알고 있어 나쁜 평가를 받은 직원이 한 명도 없었단다. 결국 전사 단위 목표를 설정하고 해당 목표 달성 여부를 체크하는 식으로 평가 방식이 바뀌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 높은 업무강도 뒷면엔 고속성장
그렇다 보니 내 일이 회사일이 되고 회사일이 내 일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모두가 같은 우주선에 탑승해 대기권을 뚫고 우주로 나아가야 하는데, 누군가가 자기 일을 못하면 자칫 공중분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 말이 쉽지 경우에 따라선 전방위 압박으로 업무가 버거워질 수도 있다.
"구성원 모두의 업무가 긴밀히 엮여있어 동떨어진 구조라 생각하기 어려워요. 매출 최전선에서 뛰고 있는 팀이 압박을 더 많이 받을 수는 있겠죠. 업무가 많고 강도가 세면 짜증날 수 있잖아요. 하지만 회사 성과가 즉각 나타나니까 고생도 어느 정도 상쇄되더라고요." (금혜원 에디터)
"'원팀·원골로 움직이기 때문인지, 시너지 효과가 나는 걸 처음 경험하고 있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훅 들어오기도 하고요. 자기 시간에 인색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서비스를 론칭해보자는 분들도 적지 않은데 그만큼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김동민 PO)
물론 지금의 비바리퍼블리카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연내 토스증권이 출범할 예정이고, 내년엔 토스뱅크까지 계획하고 있는 만큼 조직 규모는 앞으로 커질 것이 분명한데, 성과가 뚜렷한 지금 분위기가 수그러들기라도 한다면 기존 조직운영 방식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터뷰 말미에서 김태은 PO는 입사한 지 이틀된 구성원이 얼마 전 사내 공개 채널에 올린 글을 소개했다. '나는 이런 줄 알고 입사했는데 실제로 보니 그렇지 않더라' 식의 글이었다. 해당 글에는 수많은 댓글들이 달렸고 무엇이 부족하고 채워져야 하는지 난상토론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는 여기에 힌트가 있다고 했다.
"우리에게 좋은 게 과연 뭘까 판단하기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어느 조직이나 불만이 없을 수는 없겠죠. 토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누가 봐도 더 좋은 방향이면 과감하게 방향을 틀 수 있다는 점입니다. 코어밸류를 지키면서 토스에 맞는 문화를 하나씩 구축해 나가는 게 중요하겠죠."
토스는 지난 8월 주요 벤처캐피탈로부터 1억7300만달러(206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이 때 매겨진 기업가치는 3조1000억원이다. 조직 구성원 모두가 전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함께 움직이는 적극성과 시시각각 닥치는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함. '3조 유니콘' 토스가 가진 조직문화의 경쟁력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