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화한 증권업계의 고액자산가 유치 경쟁이 올 들어 후끈 더 달아오른 모습입니다. 제로(0)금리 장기화에다 정부의 부동산 규제 강화로 주식시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만큼 다들 '큰손'들을 끌어들일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겁니다.
일찌감치 VIP 자산관리서비스 시장에 뛰어들어 독주 체제를 갖춘 삼성증권을 상대로 후발주자 격인 미래에셋대우와 한국투자증권, NH투자증권, KB증권 등이 도전장을 내밀었는데요. 도전자들은 기존 고액자산가 서비스 브랜드를 재정비하고 신규 서비스를 론칭하는 한편 VIP 자산관리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들 모시기에도 열을 올리는 중입니다.
한투증권이 지난해 삼성증권과 NH투자증권에서 각각 가업승계·자산관리, 부동산 분석을 맡았던 유성원 상무와 김규정 자산승계연구소장을 스카우트해 화제를 모은데 이어 NH투자증권은 최근 국내 프라이빗뱅커(PB) 1세대이자 삼성증권 VVIP사업의 중흥을 이끈 일등공신 중 하나인 이재경 전무를 데려와 자사 초고액자산가 서비스를 총괄하는 PremierBlue본부장에 앉혀 업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처럼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대형 증권사들이 부자 고객 모시기에 혈안이 된 것은 이들이 지닌 남다른 가치 때문이죠. 금융자산만 수십억 원대에 이르는 슈퍼 리치들은 증권사들에 있어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동시에 투자은행(IB)과 같은 다른 사업 분야를 키우는데 믿음직한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증권업계의 흐름에 과감하게 반기를 들며 소액 투자자를 위한 증권사가 되겠다는 곳이 등장했습니다. '새내기 증권사' 토스증권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토스증권은 2008년 이후 12년 만에 신규 인가를 받은 증권사로, 핀테크 플랫폼 토스로 잘 알려진 비바리퍼블리카가 100% 지분을 투자해 설립했습니다.
이 회사의 박재민 대표(리더)는 얼마 전 정식 출범을 알리는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기존 증권사들은 일반 소액 투자 고객보다는 고액자산가 위주의 영업에 치우쳐 있다"고 지적하면서 "정체된 시장을 혁신하고 새로운 모바일 투자 표준을 만들어 주식시장에 입문하는 20~30 밀레니얼 세대가 쉽게 투자할 수 있게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자신들의 VIP 고객은 거액의 투자금을 굴리는 자산가가 아니라 소액으로 주식 투자에 나섰거나 나설 예정인 개미라는 것을 강조한 겁니다.
대형 증권사 관계자들에게 이 젊은 최고경영자(CEO)의 발언은 꽤나 당돌하게 받아들여졌을 듯합니다. 자본금이 500억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규모 신생 증권사가 이미 '레드오션'인 증권 리테일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면서 업계에서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대형사들의 영업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우린 다른 노선을 걷겠다고 선언한 셈이니까요.
토스증권은 말과 더불어 행동으로도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대표적인 게 주린이(주식+어린이) 맞춤형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입니다. 직접 사용해보니 기존 증권사들의 MTS에 익숙한 제게는 어색할 정도로 메뉴가 쉽고 단순합니다. '매수'나 '매도' 같은 주식 용어는 '구매하기'나 '판매하기' 등으로 풀어 표시했고, 이용자의 매매 통계를 토대로 만든 '구매TOP100'이나 '관심TOP100' 등의 메뉴 등은 음원차트를 연상시킵니다. 현재 국내 주식 거래만 지원되다 보니 메뉴가 단순하다 못해 썰렁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개발 초기부터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집중 인터뷰를 진행해 초보 투자자들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혼란스럽다고 지적한 부분은 싹 빼고 필요한 기능만 넣었다는 회사 측 설명이 이해가 갑니다. 사용자들이 늘어나면서 이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일단 '신박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토스증권에 이처럼 '튀는' 전략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존 증권사들의 안정적인 조직과 시스템, 광범위한 영업망과 오랜 경험으로 쌓인 다양한 노하우, 높은 브랜드 인지도 등은 토스증권이 깨기 어려운 거대한 장벽과도 같습니다. 이 장벽에 조그만 균열이라도 내기 위해선 투자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합니다.
때마침 지난해부터 불기 시작한 '동학개미운동' 이후 주식 투자에 새롭게 뛰어드는 이들이 눈에 띄게 많아지면서 토스증권의 차별화 전략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박재민 대표의 말처럼 기존 증권사 고객을 뺏어오는 게 아니라 투자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해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얻게 한 거죠.
게다가 토스증권은 1800만명의 사용자를 확보한 토스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두고 있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 핵심 고객 타깃으로 설정한 20~30 밀레니얼 세대만 약 1000만명으로, 적어도 수백만명의 잠재 고객이 존재한다는 게 토스증권의 판단입니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27일부터 진행한 MTS 사전 신청에는 3주 만에 42만명의 신청자가 몰리면서 사측을 고무시키기도 했습니다. 토스 전체 조직 차원에선 향후 토스 플랫폼을 축으로 증권과 보험, 카드, 은행까지 아우르며 시너지를 내겠다는 각오죠.
물론 토스증권의 전략이 통할지는 미지수입니다. 당장 타깃이 겹치는 키움증권을 비롯한 경쟁사들이 가만히 앉아 기득권과 주도권을 내줄리 만무하고 토스 사용자들이 토스증권으로 대거 넘어온다는 것은 아직 가정에 불과합니다. 매우 단순하고 직관적인 MTS 역시 구체적인 투자 정보 부재 등의 이유로 분명히 호불호가 있을 겁니다.
상당수 증권사가 비대면 주식계좌에 대해 무료 수수료를 적용하고 있는 마당에 신생 증권사가 고객 맞춤형 서비스에 대한 대가(기본 수수료 0.015%)를 받아 수익원으로 삼겠다는 아이디어도 조금은 호기롭게 느껴집니다. 토스의 외부 투자 의존도를 고려할 때 토스증권이 목표로 삼은 3년 후 손익분기점(BEP) 돌파에 실패하면 대폭적인 전략 수정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토스증권의 도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우선 12년 넘게 신규 진입자가 없어 고여 있던 증권업계에 새로운 활력과 최소한의 긴장감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는 증권사 간 서비스 경쟁을 촉발해 투자자들에 대한 서비스의 질적 향상에 기여할 수 있을 겁니다. 출범부터 주린이, 개미를 위한 증권사를 표방한 만큼 초보 투자자들에게는 여전히 높아 보이는 투자 문턱을 낮춰 주고 시장으로 진입하는 계기를 만들어줄 수도 있겠죠.
토스증권은 MTS가 모든 고객들에게 오픈되는 내달 초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합니다. 과연 개미들은 골리앗 대신 다윗의 손을 들어줄까요? 앞으로의 흥미로운 대결을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