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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제철 3.0]①'철(鐵)'을 꿈꾸다

  • 2015.07.07(화) 10:28

정주영의 밑그림 정몽구 회장이 완성
세번의 실패 끝에 이룬 제철보국의 꿈

현대제철이 하이스코를 합병하며 본격적인 성장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꿈꿔왔던 철강업을 아들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완성했다. 현대제철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철강에서 자동차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아울러 이제 국내 철강업계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누려왔던 포스코를 견제할 대항마로 성장했다. 글로벌 철강업체로 발돋움하고 있는 현대제철의 성장 과정과 향후 과제 등을 짚어본다.[편집자]

현대제철의 성장세가 무섭다. 불과 40년만에 글로벌 철강업계에서 주목받는 기업이 됐다. 외형 뿐만 아니라 내실도 갖췄다. 쇳물의 생산에서부터 자동차 강판, 특수강에 이르기까지 포트폴리오도 안정적이다. 포스코의 대항마로서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 특히 쇳물에서 자동차에 이르는 수직계열화 구축은 가장 강력한 무기다.

현대제철이 이처럼 단기간 내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최고 경영진들의 의지가 강했기에 가능했다. 수 많은 좌절 속에서도 '철(鐵)을 갖겠다'는 생각 하나로 버틴 결과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창업주)이 가졌던 꿈을 아들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이뤘다. 선친의 꿈을 현실로 만드는 데 32년이 걸렸다.

 

◇ "제철사업 못할 이유가 없다"

 

“제철은 산업의 중추다. 철강 생산능력이 증대되면 기간산업 성장이 견실해져 국가경쟁력도 강화된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늘 '철(鐵)'을 꿈꿨다. 그에게 철은 반드시 손에 쥐어야 할 보물이었다. 산업화의 최전선에서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을 누구보다도 가까이 지켜본 그다. 우리나라가 현대가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철을 갈망했던 현실적인 이유는 자동차, 중공업, 건설을 기반으로 한 현대그룹의 철 수요가 절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국내의 철은 모두 포항제철(현 포스코)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는 포철에서 가장 많은 철을 구매하면서도 을(乙)로 당하는 설움이 싫었다.

 

그는 "우리가 직접 철강을 못 만들 이유가 뭐가 있나"라며 제철사업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그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제철업은 고로를 통해 쇳물을 뽑아내는 것이었다. 고철을 전기로에 녹여 쇳물을 생산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고로를 통한 쇳물 생산의 꿈은 32년만에야 이뤄졌다.

 

▲ 현대제철 인천공장.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78년 인천제철(현 현대제철)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일관 제철소 건설을 추진한다.
 
현대그룹의 철강사업 진출은 1975년 경일공업(현대하이스코)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1977년에는 현대종합제철을 설립했고 1978년에는 인천제철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제철사업에 대한 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1978년 인천제철 인수는 당시 국내 철강업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인천제철은 전기로를 통해 쇳물을 생산하는 국영기업이었다. 당시 정부의 철강사업 민영화에 따라 매물로 나왔고 이를 현대그룹이 인수했다. 업계의 반발이 컸다. '철=국영 사업'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시기였다. 민간기업이 비록 전기로 업체지만 쇳물을 생산하는 업체를 인수했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정 명예회장은 특유의 돌파력으로 여론을 바꿔냈다. 적자 기업이었던 인천제철의 경영이 안정되면서 본격적으로 고로 사업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고로에서 쇳물을 뽑아 제품까지 생산하는 일관제철소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 무르익는 '일관 제철'의 꿈
 
인천제철 입찰 당시 산업은행은 인천제철을 공개입찰에 붙였다. 하지만 입찰자가 현대그룹 뿐이었다. 결국 산업은행은 입찰 참여업체가 1곳 뿐이라는 이유로 유찰시켰다. 정 명예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재입찰에서는 현대그룹 내 계열사를 동원해 복수 입찰 조건을 만들고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결국 인천제철은 현대그룹에게 돌아갔다.
 
현대그룹이 인천제철을 인수했던 것에는 나름의 포석이 있었다. 당시 정부는 제2종합제철소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정 명예회장은 제2종합제철소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인천제철을 인수한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인천제철 인수 후 “민간기업이 제2제철을 맡아야 경쟁체제가 갖춰지고 가격도 낮아진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제2제철 민영화론'이었다. 정 명예회장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국내 철강업계에서도 현대가제2제철소를 가져가야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정부도 고민에 빠졌다. 그때까지 제2제철소는 당연히 포철의 몫이었다. 
 
▲ 정 명예회장은 정부의 제2체철소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인천제철을 인수했다. 인천제철 인수 이후 그는 '제2제철 민영화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견제와 정부의 반대로 결국 정 명예회장의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제2제철소 사업권은 결국 포철에게로 넘어갔고 이를 통해 건설된 것이 현재의 포스코 광양제철소다.
 
정부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현대쪽과 포철쪽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최종 결정권자였던 박정희 대통령도 고민에 빠졌다. 포철이냐 현대냐를 두고 오랜기간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결국 박 대통령은 포철의 손을 들어줬다. 이때 결정된 제2제철소가 현재 포스코의 광양제철소다. 정 명예회장이 꿈꿔왔던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이 꺾인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좌절하지 않았다. 1994년 정 명예회장은 다시 한번 제철사업에 도전장을 내민다. 이번에는 부산 가덕도에 제3제철소를 짓겠다고 선언했다. 84년 광양제철소가 건설된 이후에도 국내 철강 시장은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명예회장은 이를 노렸다. 첫 실패 이후 기회를 모색했던 그에게 철강 공급 부족 전망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독점 공급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민간기업이 제철소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정부는 완강했다. 정부는 제3제철소가 지어질 경우 공급과잉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정 명예회장의 주장을 일축했다. 그의 두번째 실패였다.
 
◇ 아버지의 뜻을 잇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86년 인천제철 사장에 취임했다. 81년 현대강관(경일공업에서 사명 변경) 사장에 취임한 이후 두번째 철강기업의 수장에 올랐다. 당시 정 회장은 아버지의 제철에 대한 꿈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정 회장은 그때부터 선친의 뜻을 잇기로 결심했다.
 
두 번의 실패 이후 정 명예회장은 더 이상 제철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연산 1000만톤 규모의 일관제철소를 짓겠다는 아버지의 꿈은 아들에게로 넘어갔다. 96년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한 정몽구 회장은 선친의 뜻을 잇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는 취임사를 통해 "제철사업을 재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취임과 동시에 '하동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내부 검토 결과 경상남도 하동이 제철소 입지로 최적지라는 판단을 내렸다. 정 회장은 치밀하게 준비했다. 해당 지자체인 경상남도는 물론 지역 여론을 호의적으로 만드는데 주력했다. 경남 하동은 경남에서도 낙후된 지역이었다. 그런만큼 정 회장의 '하동 프로젝트'는 당시 지역 주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 정몽구 회장이 취임과 동시에 추진했던 경남 하동 일관제철소 부지인 갈사만. 정 회장은 현대그룹 회장 취임과 동시에 제철사업 재추진을 천명했다. 여러 군데를 후보지로 지목하고 실사한 결과 경남 하동 갈사만을 최적지로 꼽고 치밀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외환위기라는 뜻밖의 암초를 만나면서 정 회장의 일관 제철소 건설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마침 정부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현대그룹이 사업계획서를 내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정부의 전향적인 태도에 정 회장과 현대그룹도 고무됐다. 하지만 이는 얼마가지 못했다.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한 경제부처에서 또 다시 '공급과잉 우려' 카드를 빼들었다. 결국 주무 부처인 통상산업부는 최종적으로 '불허' 결정을 내렸다.
 
정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97년 독일의 티센그룹으로부터 제철소 합작투자 제의를 받아왔다. 또 경상남도와 고로 제철소 건설을 위한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정부의 방침에도 불구, 그는 제철소 건설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제철사업은 선친의 뜻임과 동시에 새로운 도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라는 생각때문이었다.
 
하지만 정 회장의 제철사업은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났다. 외환위기의 쓰나미가 몰려온 것이다. 대규모 투자는 커녕 있는 사업도 접어야 할 판이었다. 결국 정 회장은 '하동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현대그룹의 세번째, 정 회장의 첫번째 제철사업 추진 실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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