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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정의선 '엇갈린 운명'…그 뒤엔 국민연금

  • 2019.04.01(월) 16:23

국민연금, 주총서 조양호 퇴짜…정의선엔 우군 역할
주주권 행사로 주총 판세 달라져…재계 긴장감 고조

연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자들의 목소리가 전례 없이 커진 속에서 주요 기업들의 주주총회가 마무리됐다. 가장 눈길을 끈 사건은 역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사내이사직 연임에 실패한 것이다.

국민연금의 반대로 대기업 오너가 이사회에서 자리를 잃은 첫 사례가 나오면서 재계의 긴장감은 높아졌다. 국민연금이 더는 '종이 호랑이'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지난 27일 서울 감서구 발산1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주주총회 모습. 이날 주총에서 국민연금의 반대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이 좌절됐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조양호, 국민연금 반대로 낙마

조 회장은 지난 27일 열린 대한항공 정기주총에서 정관상 규정된 사내이사 선임요건을 넘지 못해 연임에 실패했다. 대한항공은 참석주주의 3분의 2(66.7%) 이상 찬성을 받아 이사를 선임토록 하고 있는데, 조 회장은 64.1%의 찬성을 얻고도 2.6% 남짓한 지분을 추가 확보하지 못해 경영권을 잃었다.

조 회장의 연임 실패는 대기업 오너가 주주들에 의해 이사회에서 밀려나는 첫번째 사례로 기록됐다. 여기에는 국민연금이 보유한 11.6% 지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주총 하루 전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의 침해의 이력이 있다"며 조 회장의 이사선임에 반대 결정을 내렸다.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서스틴베스트,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등 의결권 자문기관의 연임 반대 권고도 무시못할 영향력을 행사했다. 국민연금을 제외해도 조 회장의 연임에 반대표를 행사한 지분은 14.8%에 달했다. 땅콩회황, 물컵투척 사건 등 대한항공 일가와 관련한 부정적 여론이 결국엔 조 회장의 낙마로 이어진 셈이다.

◇ 정의선, 연금 지원 힘입어 엘리엇 물리쳐

반대의 사례도 있다. 앞서 지난달 22일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주총에선 국민연금의 입김이 미국의 행동주의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공세를 막는데 역할을 했다. 엘리엇은 배당확대와 사외이사 선임안 등의 안건을 제시했지만 공감을 얻지 못하고 패배했다. 엘리엇은 현대차 5조8000억원, 현대모비스 2조5000억원 등 총 8조3000억원의 배당을 요구했다.

국민연금과 다수의 의결권자문기관은 엘리엇의 요구를 과도한 것으로 판단했다. 무리한 배당보다 미래 성장동력에 투자하겠다는 현대차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현대차 노조 역시 "엘리엇이 현대차를 더욱 위기로 내몰고 있다"며 사측에 힘을 실어줬다.

결국 지난해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에 급브레이크를 건 엘리엇이 이번에는 변변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며 코너에 몰렸다. 재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이 이번 주총을 통해 향후 지배구조 개편을 재추진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현대모비스를 분할해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방식으로 순환출자 구조를 깨고 최대주주 중심의 지배구조를 강화하는 방안을 내놨지만 결국 이를 철회했다.

이번에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두 핵심 계열사의 대표이사에 오르면서 향후 새로운 방식의 지배구조 개편에 더욱 힘이 실릴 전망이다.

지난 22일 현대차 정기주주총회에서 의장을 맡은 이원희 대표이사 사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이날 현대차는 국민연금의 지원에 힘입어 엘리엇의 공세를 막아냈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긴장하는 재계…"이제 시작일뿐"

재계는 한진그룹과 현대차그룹의 주총이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지침)를 앞세운 국민연금의 영향력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쪽(대한항공 주총)에선 사측의 제안에 반대했고 다른 쪽(현대차·현대모비스 주총)은 사측의 제안에 찬성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두 회사 모두 결국 국민연금의 바람대로 주총 결과를 이끌어냈다.

물론 삼성바이오로직스처럼 주총 결과가 국민연금의 뜻과 반대로 귀결된 곳도 적지 않다. 하지만 재계가 느끼는 위기감은 여느 때와 사뭇 다르다. 전경련은 대한항공 주총 직후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있는 만큼 더 신중했어야 하는데 아쉽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앞으로도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최근 열린 기금운용위원회에서 기자들을 만나 "기금 운용에 손해를 끼친 기업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주주활동을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재계 관계자는 "대한항공 사례를 두고 '자본시장의 촛불혁명'이라는 시각과 '인민재판식 의결권 행사'라는 상반된 시각이 존재하는 것처럼 국민연금의 경영권 행사는 여러 논쟁적 소지를 안고 있다"며 "이번 대한항공 주총은 그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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