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의 느닷없는 대(對)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 규제에 재계 대기업집단 총수들의 발걸음이 급박해졌다. 갈수록 복잡해질 수 있는 상황을 풀어내기 위해서다.
당장 외교관계서 촉발된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게 선결과제다. 이에 더해 규제 품목 확대 등 2·3차로 연결될 수 있는 파상 공세에도 미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숨이나마 돌릴 수 있다.
8일 재계에 따르면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휴일인 7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재계 총수들과 회동을 가졌다. 회동은 김 실장 측이 기업 총수들에게 직접 연락해 성사된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청와대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까지 '5대 그룹' 총수를 모두 모은 자리를 마련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단 롯데 신 회장이 일본에 체류 중이어서 계획이 성사되지 않았다. 삼성 이 부회장의 참석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어쨌든 사전 조율없이 긴박하게 마련된 자리였다는 의미다.
청와대는 대변인 명의로 "대외 경제상황의 불확실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고 적극적으로 긴밀한 소통을 이어나가기로 했다"며 회동 사실은 확인했다. 다만 누가 참석했는지,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대응 전략 노출이나 참석 기업에 대한 피해를 우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날 재계 총수와 정부 경제컨트롤 타워 '투톱'이 만난 자리에서는 기업의 피해 우려에 대한 의견 교환이 이뤄졌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일본의 조치에 대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는 방안, 규제 품목의 국산 대체 가능성, 이에 필요한 정부 지원방안 등도 논의에 올랐을 것이란 추측도 나온다.
이렇듯 정부가 총수들을 급히 불러모은 것은 한국기업에 가해진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를 뒤늦게나마 심각하게 인식한다는 얘기다. 일본이 지난 1일 규제를 발표한 직후 조심스럽게 반응했던 초기 행보와는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흘이 지난 지난 뒤(4일) 일본의 수출 규제를 '경제 보복조치'로 규정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날 오후 6시께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일본 도쿄로 날아갔다. 이 부회장의 현지 일정 역시 공개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경제인들을 직접 만나며 수출 규제와 관련한 다각적인 해법을 모색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수출 금지 품목인 ▲불화수소 ▲레지스트 ▲폴리이미드 등이 반도체 등 삼성의 주력사업과 연관된 만큼 관련 업계 인사나 이와 연결된 금융권 인사를 만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부회장은 일본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에 유학해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은 재계의 대표적인 '일본통'이기도 하다.
다만 이 부회장이 직접적 해결 방안을 강구하기보다는 간접 지원, 우회 해결책 모색에 주력할 것이라는 게 재계 관측이다.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초강수'를 펴는 상황에 맞대응을 할 경우 자칫 삼성에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본에 체류중이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관련 사업 및 양국을 아우르는 그룹 운영에 일본의 경제보복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탐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은 방한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도 지난 4일 자리를 함께 했다. 글로벌 정보기술(IT)업계 현안과 관련한 의견 교환이 큰 주제였지만 이 자리 역시 일본의 수출 규제를 둘러싼 양국 갈등과 관련한 대화가 빠지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일본에 있는 이 부회장과 신 회장은 오는 10일 예정된 문재인 대통령과 30대 대기업 총수 등 주요 기업인의 간담회에 맞춰 귀국할 것으로 관측된다. 청와대 측은 "문 대통령을 비롯해 경제 정책 책임자들이 기업을 만나 요구를 듣고 정부의 후속 대응에 반영하기 위한 자리"라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1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필수소재인 3개 품목에서 한국을 수출 포괄 허가제에서 제외한다고 밝혔다. 개별적인 수출 허가제로 전환해 수출심사를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개별 허가시 수출심사에는 90일 정도 걸리고 이를 일본이 불허하면 수출이 막혀 사실상의 '금수조치'로 해석된다.
일본 정부는 "한일간 신뢰 손상"을 수출 제재 이유로 들고 있다.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이 일본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제철의 배상판결을 내리자, 이에 반발해 내놓은 조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