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51세가 되던 해에 이건희 회장은 '삼성 신경영'을 선언했습니다. 올해로 같은 나이가 된 이재용 부회장의 선언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합니까"
작년 10월25일.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첫 재판에서 정준영 부장판사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리고 새해 준법감시위원회(준법감시위) 설치로 삼성과 이 부회장은 첫 답을 내놨다. 법을 준수하는 경영원칙을 삼성그룹에 확실히 심어 외부에 여전히 팽배한 '의심'을 지우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 부회장이 직접 나설 수는 없었다. 삼성 준법감시위 초대 위원장을 맡은 김지형 전 대법관의 입을 빌었다. 그는 '김영란법' 제정을 주도한 김영란 전 대법관과 함께 진보적 판결로 유명한 법조계 인사다. 김 위원장은 수락 배경을 설명하면서 "위원회의 '준법경영'이 말뿐인 공허한 구호로 남지 않도록 내실도 다지겠다"고 했다.
이 부회장이 직접 자신을 찾아 '완전한 독립성과 자율성'을 약속하며 위원장직을 맡아 줄 것을 수 차례 요청했다는 게 김 위원장 전언이다. 세간의 우려를 지우고 이 부회장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그의 몫이다. 김 위원장은 "파수꾼 역할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 공언했다.
◇ 의심 지우려는 삼성의 첫발..'준법감시위'
김 위원장은 9일 본인이 대표 변호사로 활동하는 서울 서대문구 법무법인 지평 사무실에서 위원장직을 맡게 된 소회를 밝혔다. 그는 "처음에는 '삼성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 위원회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역량 부족'을 우려해 위원장직을 고사했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수락한 이유로 김 위원장은 '삼성의 진정성'을 꼽았다. 그는 "준법감시위 구성부터 시작해 운영에 이르기까지 자율성과 독립성을 전적으로 보장해달라는 조건을 제시했고, 삼성이 이 조건을 수용했다"고 밝혔다.
또 이번 시도가 삼성만이 아닌 사회 저변을 바꿀 것이란 믿음도 수락 배경에 있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이제라도 변화를 향해 열린 벽문 안으로 삼성이 들어가는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며 "삼성의 변화가 기업 전반의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 위원장은 준법경영위원회 활동으로 삼성과 사회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준법경영은 삼성을 넘어 사회 전반의 주요 의제"라며 "위원회는 삼성과 우리 사회 막힌 길을 부수고 서로 소통하고 화해에 이르는 통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준법경영위 실효성?..'총수도 가차없다'
준법감시위는 김 위원장을 포함해 총 7명으로 구성된다. 이르면 다음달 초 출범한다. 내정자는 크게 법조, 시민사회, 학계, 삼성전자 내부 등 4개 그룹에서 김 위원장이 직접 선정했다는 설명이다. 6명이 외부인사다. 대기업 부패범죄 수사, 국정농단 연루 재벌 처벌운동, 재벌구조와 경영권 비판, 재무금융 전문가 등이 자체 전문성을 토대로 준법감시위 업무에 참여키로 했다.
사측 인사로 유일하게 이인용 삼성전자 사회공헌업무 총괄 고문이 합류했다. 방송기자 출신인 그는 과거 미래전략실 사장을 거쳐 삼성 내 사정에 밝다. 과거 김 위원장이 삼성전자와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모임 '반올림' 간 질병발생 관련 책임소재, 보상안을 논의할 때 그와 인연을 맺었다.
위원회는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별도 사무국 기구와 함께 분야를 가리지 않고 삼성에 준법감시 체계를 구축한다. 대외후원금, 계열사와 특수관계인간 내부거래, 일감몰아주기, 부정청탁을 비롯해 노동조합 문제 등을 포함해 각 계열사의 모든 법 위반 가능성을 세밀하게 들여다 보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심쩍은 시선은 남아 있다. 이에 김 위원장은 준법경영 확립에 성역이 없을 것임을 강조하면서 "삼성그룹 최고위 총수의 법위반 행위에 예외를 둔다면 위원회 의미가 없다"고 힘줘 말했다. 활동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 조사권을 행사하고, 위법 사항이 확인되면 관련 인사들과 계열사에 대해 제재 등 시정조치를 요구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위원회는 이미 삼성 내부에 준법경영을 위해 설치돼 있던 감사위원회, 컴플라이언스위원회부터 뜯어볼 계획이다. 김 위원장은 "감사위와 컴플라이언스 위원회가 왜 제대로 작동 못했는지 심층적으로 면밀히 분석하겠다"며 "이에 대한 개선안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 파기환송심에도 영향 미칠까
준법감시위원회 구성에 대해 삼성 측은 "위원회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존중, 글로벌 수준의 준법 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도록 이사회 의결 등 필요한 절차를 신속히 진행하겠다"는 짧은 입장을 내놨다.
시민사회 및 정치권 일각에서는 준법위원회 설치가 이 부회장 파기환송심 형량을 감경하는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1부는 지난해 10월 파기환송심 첫 공판에서 이 부회장과 삼성에게 '내부 준법감시제도 마련' 등의 주문을 던졌다.
재판부는 이 같은 주문이 재판 결과와는 무관할 것이라고 전제했지만 이를 '작량감경'의 가능성과 연결하는 시각도 있다. 작량감경이란 법률상 감경사유가 없더라도 법률로 정한 형이 범죄의 구체적인 정상에 비춰 과중하다고 인정되면 법관이 재량으로 형을 감경하는 것을 말한다.
재판부 정준영 부장판사는 가장 최근인 작년 12월 3차 공판에서도 "정치 권력으로부터 또 다시 뇌물 요구를 받더라도 응하지 않을 그룹 차원의 답"을 이 부회장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 파기환송심 4차 공판은 오는 17일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