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내서 빚을 갚는 것을 '돌려막기'라고 합니다. 원리금을 갚을 여력이 안되면서 과도하게 빚을 냈을 때 이를 막는 방안입니다. 카드로 금리가 높은 현금서비스를 받거나, 카드깡(신용카드로 결제 뒤 일부 수수료를 제하고 현금을 받는 것) 등이 대표적 돌려막기 방법입니다.
기업도 이와 유사하게 돌려막기를 하는데요. 채권인 공모 회사채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회사채 만기가 임박하면 회사채를 다시 발행하는 '차환'을 통해 자금을 상환합니다. 회사채를 갚느라 일시에 큰 돈이 빠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죠. 대다수 기업이 차환 목적으로 회사채를 발행합니다. 회사채는 발행 전 투자자들이 얼마나 몰릴지 수요 예측 등 절차가 복잡해 신용도 낮은 개인이 쓰는 돌려막기와는 엄밀히 얘기하면 결이 다릅니다. 물론 자금여유가 있으면 자체 자금으로 회사채를 상환하면 되겠죠.
그런데 경기 악화로 인해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지면 어떻게 될까요. 차환을 염두에 두고 과거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은 날벼락을 맞겠죠. 수익은 줄어드는데 대규모 자금을 일시에 상환하는 지출로 이중고를 겪을 게 뻔하죠. 정부가 최근 도입한 '회사채 신속인수제(회사채 차환 지원제)'는 이같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란 전에 없는 위기에 직면한 기업들을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같이 보증한다'
회사채 신속 인수제는 회사채 재발행이 시급한 기업에 차환을 신속하게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회사채 만기가 목전에 있는 기업이 사모 방식으로 회사채를 발행할 경우 산업은행(산은)이 과반 이상을 인수합니다. 나머지는 기업이 자체 상환합니다. 책임 분담 차원이죠.
다만 산은 홀로 회사채를 부담하지 않습니다. 산은이 이를 채권은행과 신용보증기금(신보)에 팔면 회사채라는 자산을 기초로 증권화가 이뤄집니다. 미래 이자 수취라는 현금 흐름을 기초로 담보가 된 회사채를 잘개 쪼개 여러 수요자에게 되파는 방법이죠. 미래 기대수익을 토대로 현재 자금을 끌어오는 채권 담보부 증권(P-CBO)이라는 금융 기법입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미래 항공객들이 지불할 것이라 가정한 이용요금 '항공운임채권'을 기초로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하는 것과 비슷한 구조입니다.
신보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회사채에 보증을 서 신용도를 강화합니다. 회사가 회사채 만기일이 도래했을 때 차환을 하기 어렵거나, 자체 상환이 어려울 경우 신보가 회사채 상환을 대신 해주겠다는 계약입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회사채를 더 저렴한 금리로 조달할 수 있고, 투자자 입장에서는 빚을 떼일 염려가 없게 되니 서로 '윈윈'이겠죠. 1997년 한국 외환위기(IMF) 이후 은행, 과거 종합금융사 등이 상환을 보장하는 보증 회사채가 시장에 종적을 감춘 만큼, 회사채는 공공기관 신보가 보증한 P-CBO를 거쳐 매력적인 조건으로 탈바꿈합니다.
정부가 코로나19 위기 타개책으로 들고 나온 것이 회사채 신속인수제입니다. 정부는 지난달부터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연달아 열고 기업 금융조달 시장 안정화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이 가운데 회사채 신속 인수제는 신용등급 A~BBB급 대상 기업에 2조2000억원, BBB급 미만 기업에 6조7000억규모로 조성됩니다. 신청은 지난 27일부터 시작됐으며, 다음달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됩니다.
회사채 신속인수제는 기업에 단비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올해 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국내 회사채가 4월을 포함해도 38조3720억원에 이르는 만큼 대규모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연간 회사채 발행액이 총 27조3247억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보다 1.4배나 되는 규모입니다.
최근 국고채 3년물과 회사채 무보증 3년물(BBB-) 금리 격차가 28일 기준 1.35%포인트로 올들어 가장 큰 격차를 보이는 만큼 기업들은 회사채 발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금리 격차가 클수록 위험도가 높고 소비자들이 회사채를 덜 선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사채 가격이 떨어지면 금리가 올라가서 그렇습니다.
회사채 신속 인수제는 과거에도 도입된 바 있습니다. 2001년 현대건설, 현대상선, 쌍용양회, 하이닉스반도체(SK하이닉스 전신), 2013년 동부제철, 한라건설, 현대상선 등이 지원 대상이었습니다.
대다수가 외환위기, 업황 악화와 같이 외부 요인으로 재정이 어려워진 기업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올해에만 올 하반기 2550억원 규모 회사채 만기가 도래하는 대한항공 등 코로나19로 업황이 악화된 기업이 대상이 될 것이란 관측입니다.
◇ '맨입으로 줄까'
회사채 신속 인수제는 차환 여력이 없는 기업에게는 좋은 제도입니다. 다만 장점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제도는 엄밀히 얘기하면 국민 세금이 들어갑니다.
공공기관 산은이 인수하고 신보가 보증하는 과정의 업무비용, 회사 지불여력이 없을시 신보가 이를 대신 상환하는 등 정부의 역할이 개입합니다. 지원대상 기업과 업종을 둘러싸고 특혜 시비가 불거질 수도 있습니다.
혜택이 제공되는 만큼 조건도 따라 붙습니다.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미국 정부 구제금융 대상 기업들이 임직원들에게 대규모 성과급을 지급한 것으로 드러나 빈축을 산 일이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를 반면 교사삼아 최근 자국 항공산업에 코로나19 긴급 구제금융 250억달러(약 30조5000억원)를 지원하며 일정 기간 동안 고용 총량 유지, 임원 고액보수 제한, 내년까지 배당금 지급과 자사주 매입 등의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정부도 물론 회사채 신속 매입시 조건을 부과할 계획입니다. 금융위원회는 일정규모이상 중견기업과 대기업의 경우 특정비율 이상 고용 총량을 유지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가산 금리 부담을 지우겠다고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같이 강제 조건을 부과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산업은행이 회사채를 인수했다고 해서 기업의 상환의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급한 불'을 끈 것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해당 기업의 경영상황에 따라 위기는 다시 찾아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