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영특한 토끼의 특성과 지혜를 상징하는 검은색이 조화를 이룬 계묘년, '검은 토끼의 해'다. 하지만 우리 기업을 둘러싼 대내외적 환경은 녹록지 않다. 국가 간 갈등은 장기화되고 고물가, 고환율, 고금리, 저성장 등 여러 경제위기 요인도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대기업집단 총수들은 '토영삼굴(兎營三窟)'의 지혜로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최고경영자(CEO)들의 경영 과제와 판단의 방향을 신년사 등에서 엿보이는 열쇳말과 함께 들여다봤다.[편집자]
"열심히 해야죠."
지난달 30일 동남아시아 출장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새해 경영 계획에 대한 대답이다. 간결하지만 현재 여러 불확실성 앞에 놓인 삼성의 총수에겐 최선이다.
이 회장은 2023년 첫날부터 '열심'을 실천했다. 9박10일의 출장 여독이 채 풀리지도 않았을 새해 첫날부터 적극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지난 2일 삼성전자 시무식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지만, 같은 날 열린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참석했다.
이날 저녁에는 삼성그룹 계열사 사장단 40여명을 서초사옥으로 불러 모아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이들은 신년 사업 전망과 전략 등에 대해 이야기하며 '비상경영' 의지를 다진 것으로 전해진다.
불황 극복 위한 '비상경영'
이는 삼성그룹이 현재 위기 상황에 직면했음을 짐작케한다. 그룹의 중심인 삼성전자는 최근 사실상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전사적으로 해외 출장, 소모품 비용 등 불필요한 경비를 절감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특히 삼성그룹 전체 실적을 이끄는 삼성전자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점은 이 회장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다. 삼성전자의 지난 3분기 영업이익은 10조8520억원으로 전년 대비 31.4% 감소했다. 삼성의 10개 비금융 계열사 총 영업이익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년 3분기 기준 84.3%로 전년(92.1%) 대비 큰 폭으로 줄었다.
영업이익 하락 폭도 삼성전자가 가장 컸다. 올 3분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률은 14.1%로 타 계열사에 비하면 높은 편이지만,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7.2%포인트 감소했다. 이에 따라 10개사 평균 영업이익률도 17.7%에서 12%로 떨어졌다.
이는 반도체 불황 영향이 크다. 실적 버팀목이던 코로나 특수가 사라지며 세트(완성품) 수요가 위축됐다. 이에 따라 메모리 반도체도 부진에 빠졌다. 특히 최근 들어 '반도체의 겨울'은 더욱 혹독해지고 있다. DS(반도체) 부문의 3분기 영업이익은 5조1200억원으로 전년(10조600억원)과 비교해 반토막 났다.
4분기는 이보다 더 악화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세계 최대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영업이익 전망치를 기존 2조6000억원에서 1조5000억원으로 하향 조정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83% 감소한 수준이다.
뉴삼성 위한 '기술 초격차' 지속
이 회장은 현재의 위기를 넘기고 만들어낼 '뉴삼성'의 중심축으로 '기술 초격차'를 내세울 전망이다. 그는 인재 확보와 기술 투자가 뉴삼성을 위한 필수 조건임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이 회장은 지난해 6월 유럽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봐도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 같다"고 언급한 바 있다. 지난해 10월 취임 직후에도 "미래 기술에 우리의 생존이 달려있다"며 "최고의 기술은 훌륭한 인재들이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올해 첫 투자처로 '로봇'을 점찍은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4일 레인보우로보틱스는 삼성전자를 상대로 총 589억8208만원 규모의 3자배정 유상증자를 실시한다고 공시했다. 이는 시설자금 289억원과 운영자금 300억원이 포함된 금액이다.
지난 2011년 설립된 레인보우로보틱스의 주요 제품은 '협동로봇'이다. 협동로봇은 6축 이상의 관절로 구성된 로봇팔로 사용자가 요청하는 위치 및 방향각을 가지도록 움직이는 기계장치다. 레인보우로보틱스의 협동로봇은 자체적으로 개발한 핵심 부품과 소프트웨어, 제어 알고리즘이 적용돼 기술력과 원가경쟁력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레인보우로보틱스의 다양한 협력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로봇은 삼성전자가 미래 신성장동력으로 낙점한 분야다. 이 회장은 지난 2021년 8월 로봇·AI(인공지능)을 포함한 미래 신사업 분야에 향후 3년간 24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예고된 M&A, 활발한 현장 경영
나아가 올해는 이 회장이 '회장'으로서 보내는 온전한 첫해다. 그런만큼 다양한 경영 판단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1년부터 대규모 인수합병(M&A)를 예고해왔다. 실탄도 충분하다. 삼성전자가 보유한 현금은 지난해 3분기 기준 128조원에 달한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6년 미국 전장기업 하만 인수 이후 이렇다 할 대형 M&A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 회장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해외 현장 경영 행보를 적극적으로 펼칠 전망이다. 그는 지난달 동남아 출장에 이어 이달 15일부터 20일까지 스위스에서 열리는 다보스포럼에 참석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보스포럼은 전 세계 정·재계 주요 인사들이 스위스 다보스에 모여 주요 글로벌 현안을 논의하는 민간 회의다. 이어 상반기 중 예정된 미국 테일러시 제2파운드리 공장 착공식에도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글로벌 행보의 걸림돌은 해묵은 '사법 리스크'다. 이 회장은 지난 2020년 9월부터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재판을 진행 중이다. 매주 목요일 열리는 재판에 출석해야 한다.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두 회사의 주가를 인위적으로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이 회장은 이에 대한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어 재판 장기화가 불가피하다. 업계에서는 확정판결을 받기까지 3년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재판도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