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감기약 구매 제한 조치를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앞서 정부는 지난 3일 서면으로 공중보건위기대응위원회 회의를 열고 감기약 부족 현상을 막기 위한 유통 개선 조치를 논의한 바 있습니다. 감기약 등 호흡기 관련 의약품을 1인당 3~5일분만 구매하도록 제한하는 내용이 회의의 골자였습니다.
감기약 품귀 우려는 중국 보따리상이 국내 약국에서 감기약 600만원어치를 사재기했다는 일부 언론 보도로 불거졌습니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이는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라고 합니다. 약사업계는 "실제 중국인 감기약 대량 구매 사례가 파악되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의 구매 제한 조치는 오히려 국민 불안을 부추겨 가수요를 늘릴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고요.
정부가 결국 이 같은 의견을 수용한 겁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감기약 구매 제한으로 발생할 수 있는 국민의 불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당장 추가적인 조치의 필요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또 감기약 구매를 제한하는 대신 유통 현황 등을 집중 모니터링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제약바이오 업계에선 현재 정부의 정책만으론 감기약 품귀 우려를 해소할 수 없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식약처는 지난해 3월 감기약 수급 현황 모니터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선 약국에선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토로합니다. 의약품의 생산·판매·재고량 파악은 가능하지만 부족한 물량을 도매 업체에 요청해도 수급이 잘 이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제약사의 감기약 증산을 유인하기 위해 내놓은 약가 정책 역시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지난해 정부는 코로나19 치료에 사용된 조제용 감기약을 사용량-약가 연동 협상 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사용량-약가 연동 협상 제도는 사용량이 일정 수준 이상 증가하면 제약사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약가협상을 통해 의약품 가격을 인하하는 제도입니다. 최근엔 이례적으로 약가 인상 카드까지 꺼냈습니다. 조제용 아세트아미노펜 650㎎(총 18품목) 의약품 가격을 정당 50∼51원에서 70원(최고 20원 가산)으로 올리고 제약사에 긴급 생산 명령을 발동했습니다.
제약사들은 난감하다는 입장입니다. 이번 품귀 현상은 조제용 감기약에서 시작해 사재기 소문이 돌면서 일반용 감기약까지 확산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의약품은 크게 △약국에서 구매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과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구매할 수 있는 전문의약품으로 나뉩니다. 보통 감기약의 경우 조제용(전문의약품)과 일반용의 성분은 동일하지만, 조제용은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돼 약가가 훨씬 낮게 책정됩니다. 예를 들어 이번 약가 인상 전 기준으로 아세트아미노펜 650㎎의 일반용은 정당 200원, 조제용은 정당 50~51원 수준이었습니다. 제약사에는 조제용 감기약이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떨어지는 제품인 겁니다.
또 의약품 생산 라인을 변경하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조제용 감기약을 증산해도 제약사의 실적 개선엔 크게 도움되지 않았다는 거죠.
국내 한 제약사 관계자는 "애초에 조제용 감기약은 마진이 적은 데다 이번 약가 인상폭도 조제용 감기약의 원가만 보전하는 수준"이라면서도 "정부의 요청과 위기 상황 대응 등을 위해 증산을 결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국내 제약사들의 감기약 생산 라인은 현재 풀(full) 가동 상태입니다. 조제용 생산을 늘리면 그만큼 일반용이나 다른 의약품 생산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됩니다.
전문가들은 감기약 수급 안정화를 위해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감기약의 과다 처방 근절, 성분명 처방, 대체조제 활성화 정책 등이 대표적인 방법으로 거론됩니다. 실제 감기약 수급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모니터링을 시스템을 정교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고요. 일각에선 감기약 수급 불균형의 원인으로 꼽히는 조제용과 일반용의 약가 차이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제약산업은 규제산업입니다. 시장의 논리보다 정부의 정책에 따라 더 많이 좌우됩니다. 그래서 제약 관련 정책은 건강보험 재정 낭비를 막는 동시에 의약품을 만드는 제약사의 의지를 꺾지 않도록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감기약 대란을 피하기 위해선 공공 영역의 상상력이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