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법을 폐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재차 강조하고 나섰습니다. 보조금 지원을 두고는 "엄청난 돈 낭비"라며 비난의 강도를 높이기도 했죠.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고심은 깊어질 수밖에 없는데요. 비즈워치가 전문가 5인의 분석을 통해 향후 전망 및 대안을 살펴봤습니다.
천억달러 받고 뒤통수…한국도 사정권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자국 반도체 산업 주도권을 한국과 대만에 빼앗겼다고 언급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간 트럼프가 "대만이 반도체 산업을 가져갔다"고 여러 차례 주장한 적은 있었지만, 한국을 함께 거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요.
그는 지난 7일(현지시각) 기자들에게 "반도체는 대만이 독점적으로 만드는데 이는 우리에게서 훔쳐간 것"이라며 "일부는 한국에도 있지만 대부분 대만에 있다"고 말했죠.
이어 "외국과 무역에서 손해를 보고 있다"며 "미국에 오는 회사들에 10센트도 주지 않을 것"이라며 강조, 사실상 반도체법 폐기에 대한 입장을 밝혔는데요. 그는 인센티브 없이 관세 압박만을 통해서도 미국 내 공장 유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만 TSMC가 대규모 대미(對美) 추가 투자 계획을 밝힌 지 불과 나흘만이라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앞서 지난 3일 웨이저자 TSMC 회장은 백악관을 방문, 미국에 총 1000억달러(145조50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애리조나주에 생산시설 5개를 건설하겠다는 게 골자였죠.
이로써 TSMC의 미국 현지 투자액은 총 1650억달러로 집계,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외국인 직접 투자(FDI)가 될 전망이었습니다. 당시 트럼프도 "이것은 미국에 엄청난 일"이라고 환영했었고요. 이러한 태세 전환에 "TSMC가 뒤통수를 맞았다"는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는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사실 트럼프가 '반도체법 폐지'를 주장한 것은 이번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4일에는(현지시각) 미 연방의회 의사당 연설을 통해 "반도체법과 남은 것은 모두 없애야 한다"며 "그 돈으로 부채를 줄이거나 다른 어떤 것에든 원하는 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었죠.
한국 내 긴장이 고조되는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미국 반도체법에 기반한 보조금을 바탕으로 대미 투자를 결정한 기업들은 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트럼프 발언대로 반도체법이 폐지될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은 기존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약속한 보조금 7조5000억원 가량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우선 삼성전자는 현재 건설 중인 테일러 파운드리 공장에 오는 2030년까지 370억달러(53조7000억원) 이상을 투자키로 하고, 미 상무부와 지난해 말 47억4500만달러(6조9000억원)의 직접 보조금 지급 계약을 체결했고요.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38억7000만달러(5조6000억원)를 투자, AI 메모리용 어드밴스드 패키징 생산 기지를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4억5천800만 달러(6600억원)의 직접 보조금 지급이 결정됐죠.
'트럼프라서' 가능한 시나리오
업계는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구체적 정책 방향이 나올 때까지는 신중히 살피겠다는 게 공통된 입장인데요.
전문가들의 전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법안 폐지는 미 의회를 거쳐야 하기에 백지화 가능성이 낮다"는 의견과 "전면 폐지를 않더라도 이행하기로 했던 보조금 등 주요사안을 일부 무력화, 사실상 폐지와 같은 효과를 낼 것"이란 관측이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우선 폐지 가능성을 낮게 보는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강한 발언이 재협상 도구로 활용될 것으로 내다봅니다. 강한 압박을 통해 미국 내 추가 투자 등을 끌어내겠다는 심산이 깔렸다는 거죠.
박상기 한국협상학회 부회장(BNE협상컨설팅 대표)은 "트럼프는 협상을 원점으로 돌리는 '그라운드 제로'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며 "이는 최상위 협상 기법으로 모든 룰을 본인에게 유리하도록 다시 세팅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박 부회장은 "이는 처음의 목표나 의도를 바꾸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추가 및 강화하기 위함"이라며 "다만 룰을 공식적으로 파괴하면 외교적 부담이 클 수 있으니 일단 내뱉는 방식을 통하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도 "트럼프는 '바이든 지우기'를 위해 반도체법 폐지를 주장하고 있지만 결국 그 여부를 결정 짓는 것은 의회"라며 "여야를 떠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및 반도체법이 상당히 효과적이고 중국을 배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평가되기 때문에 폐지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트럼프이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김홍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장은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유예하면서 종국엔 법안 폐지까지 이어지는 시나리오가 예상된다"며 "단순 협상용 이상의 스탠스가 지속, 트럼프 레임덕이 오기 전 향후 1년 반에서 2년 가량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고요.
김양팽 산업연구원 반도체전문연구원은 "트럼프라면 의회를 통한 폐지 수순을 밟지 않더라도 당초 이행키로 했던 주요 세부 내용을 제한하는 식으로 폐지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며 "예컨대 '보조금 지급' 조항을 무력화할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고 언급했습니다.
트럼프의 진짜 속내는
이어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성향과 기질에 맞춰 다양한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특히 트럼프 행보의 전체 전선을 관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설명입니다. 그의 발언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경제·산업 전반의 흐름을 살펴야 한다는 건데요. 최소한의 비용으로 트럼프의 만족도를 끌어올리려면 철저한 분석이 수반돼야 합니다.
박상기 부회장은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국익을 우선시하겠다고 하지만 사적 이익에도 관심이 많은 트럼프를 만족시키는 것은 오히려 간단할 수 있다"며 "가령 500억달러 투자를 요구하더라도 100억달러만 투자하되 나머지 만족할 만한 다른 것들을 잘 붙여나가는 것 그것이 협상"이라고 제언했습니다.
그는 "세부적으로 아주 조금씩 디테일하게 야금야금 던지면서 제안해야 한다"며 "전문가들을 투입, 트럼프의 니즈를 분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같은 맥락서 '한미 FTA 재협상 가능성'도 거론됩니다. 표면적으로는 반도체법 폐지를 언급하지만, 속내는 FTA 대상에 농산물을 포함시키려는 것이란 분석에 기반한 겁니다.
앞서 트럼프는 반도체법 폐지를 주장하는 배경 중 하나로 "한국이 미국보다 관세율이 4배가 높다"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 한미 FTA에 따라 대부분 공산품에 대해선 무관세가 적용되고 있지만, 쌀 등 일부 농산품은 관세 철폐 대상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의 평균 관세율은 12%이고 미국은 2.5%"라며 "특히 한국이 미국 쌀에 대해선 500% 넘는 고관세를 부치는데, 결국 트럼프는 미국 농산물을 많이 팔기 위한 재협상 요구를 위해 그러한 발언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일각선 미국 반도체 투자 규모를 줄이거나 전면 철회를 고려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옵니다. 김양팽 연구원은 "반도체법에 따른 보조금 지급 조건은 투자 금액의 일부인데 SK하이닉스의 경우 미국 내 공장을 아직 짓지도 않았다"며 "바꿔 말하면 본격 투자가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고 만일 보조금을 주지 않는다면 한국 기업들도 투자를 재검토하는 등 대응 방안이 아직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