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체된 성장, 불확실한 통상환경, 무거운 규제. 경제계가 더는 기다릴 수 없다며 정치권에 직접 목소리를 냈다. 8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경제5단체장 간 간담회에서 재계는 인공지능(AI) 육성부터 정년 연장, 주 4.5일제까지 민감한 현안을 가감 없이 꺼냈다.
"GDP 7조달러 만들자"…최태원의 초국가 구상
이날 이 후보와 경제5단체 간 간담회는 단순 '건의' 자리를 넘어 한국 경제가 직면한 총체적 위기를 정면으로 마주한 시간이기도 했다.
새로운 성장 전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두고 공감과 논의가 오간 가운데 AI와 신산업 육성 및 통상환경 변화 대응 등 큰 틀의 방향에선 후보와 재계가 뜻을 같이했지만, 노동시간과 세제 등 민감한 정책 현안에서는 분명한 온도차가 드러났다.
이날 간담회에는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SK그룹 회장),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 윤진식 한국무역협회 회장, 최진식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 등 경제5단체장을 비롯해 삼성·LG·현대차 등 주요 기업인 약 300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은 입을 모아 "한국의 성장 엔진이 꺼졌다"며 △규제 혁신과 신산업 지원 △해외 고급인력 유치 △통상환경 변화 대응 등 대대적인 정책 전환을 촉구했다.

우선 최태원 회장은 "성장 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며 경제공동체 구상을 강조했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위해 일본과 경제연대를 모색, 경제 규모를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는 제언이다. 그는 "현재 2조달러가 안 되는 대한민국의 국내총생산(GDP)을 일본과 합치면 7조달러에 달하는 경제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 투자로 수입을 확보하는 '본원적 수지' 중심으로 경제구조를 전환해야 한다"며 "인구·소비 기반을 확대해 경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류진 회장은 "올해 한국 성장률이 1%를 넘지 못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온다"며 "항공우주·AI·바이오·스마트팜 등 미래 산업 육성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특히 "미국·중국·일본처럼 인프라를 직접 지원하고 테스트베드·세제 개선 등으로 투자 부담을 낮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진식 회장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을 정면으로 거론했다. 그는 "최근 무역협회 조사에 따르면 수출기업 4곳 중 3곳이 미국발 관세로 피해를 입고 있다"며 "상호 관세 조치가 시행되면 수출 현장의 혼란이 불가피한 만큼 대미 통상 아웃리치에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 제안은 '제21대 대선 미래 성장을 위한 국민과 기업의 제안'이라는 이름의 제언집으로 이 후보에게 공식 전달됐다. 제언집은 △AI·탄소중립 등 성장동력 확보 △신산업·서비스업 중심 산업 이식 △수출 및 해외시장 확대 △노동·금융·인력 기반 조성 등 4대 분야 14개 아젠다를 담았다.
노동·세제 공약 우려…"정년연장, 세대 갈등 키운다"

아울러 이날 간담회에선 이 후보의 일부 노동 관련 공약에 대한 산업계의 우려도 거침없이 제기됐다. 손경식 회장은 "정년 연장은 청년 일자리 위축과 세대 갈등 심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일률적 법제화보다는 퇴직 후 재고용 등 유연한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 4.5일제 도입에 대해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며 "노사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진식 회장은 "청년들이 이과는 의대, 문과는 로스쿨만 바라보는 현실이 계속되면 대한민국의 기술경쟁력은 무너진다"며 인력 양성 시스템의 전면 개편을 요구했다.
기업 승계와 관련해선 상속세 문제를 거론했다. 최 회장은 "상속·증여세를 단순 '부의 대물림'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드는 기반이란 시각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후보는 "기업과 노동자 입장 모두 타당한 점이 있다"며 "밀도 높은 사회적 대화와 조정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세제 개편 요구에 대해선 "이해관계가 복잡해 즉흥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