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의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4) 납품처가 '멀티벤더' 체제로 넘어가는 국면서 글로벌 3위 메모리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이 잇따라 악재를 맞고 있습니다. 기술 검증 지연과 대형 팹 가동 연기 속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양강 구도가 한층 공고해질 것이란 관측이 힘을 얻는데요.
11일 업계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6세대 제품인 HBM4에 대해 엔비디아 인증 절차를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홍콩 GF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마이크론이 엔비디아가 제시한 데이터 처리 속도 초당 10Gbps를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수율 이슈까지 겹치면서 HBM4 대량 출하 시점이 2027년으로 연기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습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내년부터 HBM4 양산을 목표로 속도를 내는 상황과 대조적이죠. 최근 HBM 세대가 1년 단위로 교체되는 점을 고려하면 2~3년 납품 지연은 치명적인데요. HBM4E 등 차세대 제품까지 감안할 경우 마이크론의 속도전 실패가 중장기 경쟁 구도에 미칠 파장도 작지 않다는 평가입니다.

설계서 밀리고 공장 늦고…마이크론 '이중 악재'
마이크론이 발목을 잡힌 건 설계 방식부터 달랐기 때문입니다. HBM4는 여러 층의 메모리를 쌓아 만든 구조인데, 그중 맨 아래층인 '베이스다이'는 데이터를 주고받는 통로이자 메모리의 '두뇌' 역할을 합니다.
마이크론은 이 베이스다이를 기존 D램 공정으로 직접 만들고 있습니다. 비용을 줄이면서 효율을 높이겠다는 전략이었죠. 하지만 SK하이닉스는 세계 1위 파운드리인 TSMC와 협력했고, 삼성전자는 자체 파운드리 공정을 활용해 훨씬 미세한 로직 회로를 적용했습니다.
이 차이가 결정적이었습니다. 파운드리 초미세 공정을 적용하면 속도와 전력 효율을 동시에 높일 수 있고 엔비디아처럼 요구가 까다로운 고객 맞춤형 설계도 가능하거든요. 결국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비싸더라도 제대로 만들자"를, 마이크론은 "싸고 빠르게 가자"는 선택을 각각 택했다가 성능 검증 단계에서 막혔습니다.
엔비디아가 요구한 속도(초당 10Gbps)를 충족하지 못하면서 마이크론은 결국 제품 재설계에 들어갔습니다. 양산 일정도 2027년 이후로 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설계만이 아닙니다. 미국 뉴욕 클레이에 짓고 있는 메가 팹도 당초 2028년 가동이 목표였지만 공급망 차질과 인력난으로 일정이 2030년 말 이후로 늦춰졌습니다. 이곳은 차세대 초미세 공정을 도입하는 핵심 기지로 HBM4 이후 세대를 책임질 생산 거점으로 꼽혀왔습니다. 하지만 착공과 장비 반입이 잇따라 늦어지며 전체 일정이 꼬였죠.
마이크론은 인재 확보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 주요 대학을 돌며 신입 엔지니어 채용 설명회를 열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출신 경력자 영입에도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올해 말부터 건국대·서울시립대·부산대 등 공대 중심 대학에서 채용 행사를 열고 공정·품질·설비 등 주요 직무 인력을 선발할 계획이에요. 선발된 엔지니어들은 대만의 HBM 생산 기지에 투입될 예정입니다.
글로벌 채용 플랫폼인 '링크드인'에는 '대만 마이크론 공장 근무 국내 엔지니어 모집' 공고가 잇따라 올라오고 있습니다. 연봉은 최대 2억원 수준으로 알려졌어요. "삼성과 SK의 본거지인 한국에서 이 정도 규모로 인재를 빼가는 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HBM4처럼 공정 난도가 높은 제품일수록 사람 싸움이 치열하죠. 하지만 기술 검증과 팹 가동 지연으로 벌어진 시간 차를 인재 수혈만으로 단기간 만회하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점유율 지형 재편…SK 60%·삼성 30%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HBM4 경쟁을 단순 수주전이 아닌 'AI 메모리 생태계 전쟁'의 서막으로 보고 있습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는 최근 'SK AI 서밋 2025'에서 '풀 스택 AI 메모리 크리에이터' 비전을 공개하며 "AI는 기존 메모리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데이터와 연산을 요구한다. 모든 메모리를 AI에 최적화해 새로운 시장을 만들겠다"고 밝혔습니다.
SK하이닉스는 AI 전용 D램과 낸드인 'AI-D', 'AI-N' 투트랙 전략을 제시했죠. AI-D램은 △데이터센터 효율과 총소유비용(TCO)을 낮추는 최적화 제품군 △메모리 병목을 해소하는 혁신 제품군 △산업·로봇·모빌리티로 확장되는 응용 제품군으로 세분화됩니다. AI-낸드는 성능·대역폭·집적도를 기준으로 라인업을 재편하고 있습니다.
생산능력 확대도 공격적입니다. SK하이닉스는 청주 M15X 공장을 조기 오픈해 내년부터 HBM4를 본격 양산, 내년 하반기에는 전체 D램 웨이퍼 투입량을 월 60만장대까지 확대할 계획입니다. 2027년 이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완공되면 HBM 캐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용인 클러스터에는 대형 팹 4개가 들어서며 완공 시점에는 청주 M15X 24개가 동시에 돌아가는 규모가 된다"고 설명했죠.
삼성전자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평택 P5 공장 건설을 재개하고 P4 일부 라인을 HBM 전용으로 전환했습니다. 범용 D램 공정을 순차적으로 HBM 생산으로 전환하며 비중을 확대하고 있죠. 또 용인 첨단시스템반도체 국가산단에는 2030년 첫 팹 가동을 목표로 6개 팹을 건설 중입니다.
양사는 3분기 실적 발표에서 "내년 HBM 물량은 사실상 완판됐다"고 밝혔는데요. 업계에선 올해 2분기 기준 SK하이닉스 62%, 마이크론 21%, 삼성전자 17%였던 HBM 시장 점유율이 내년 SK하이닉스 60%, 삼성전자 30% 이상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승부는 품질과 납기"
변수는 엔비디아의 멀티벤더 전략입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지난 8일 기자들과 만나 "SK하이닉스·삼성전자·마이크론으로부터 HBM4 샘플을 모두 받았다"며 "세 회사 모두 뛰어난 제조업체이며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생산 능력을 크게 늘렸다"고 언급했죠.
엔비디아는 내년 하반기 출시 예정인 차세대 AI 가속기 '루빈'에 HBM4를 탑재하는데요. HBM3E를 독점 공급해온 SK하이닉스 중심 구조에서 HBM4부터는 복수 납품 체제가 본격화됩니다. 수요가 공급을 압도하던 '솔벤더' 시대와 저물고, 가격 경쟁력과 납기 안정성이 곧 수주 물량으로 직결되는 구조로 바뀌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HBM4 주요 공급 파트너로 확정된 분위기입니다. 황 CEO는 경주 APEC CEO 서밋에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부터 HBM4 샘플을 확보했고 잘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둘 다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죠.
엔비디아는 공식적으로 세 회사 모두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기술 검증을 통과하고 물량을 확보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무게 중심이 쏠린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마이크론은 재설계와 팹 가동 지연이라는 이중 부담 속에서 추격의 실마리를 찾는 모습입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반도체전문연구원은 "만약 마이크론의 HBM4 재설계가 사실이라면 이는 스스로 기술적 결함이나 부족함을 인정한 셈"이라며 "재설계 후 다시 양산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 그 사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우선 공급자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습니다.
이어 그는 "HBM4는 이제 막 시장이 열리는 단계이기 때문에 누가 먼저 납품하느냐가 향후 점유율을 좌우한다"며 "엔비디아가 멀티벤더 체제를 도입하는 건 당연한 기업 논리지만 결국 품질과 납기 안정성을 모두 갖춘 업체가 승기를 잡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 연구원은 "메모리 반도체는 제품 간 스펙 차이가 크지 않아 가격 경쟁력보다는 수율과 원가 효율이 관건"이라며 "엔비디아가 주요 고객으로 자리한 이상 제조사 간 단가 차이가 크지 않을 것이고 공정 효율화에 성공한 기업이 더 높은 이익률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