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산업의 '투자 속도'를 높이기 위한 정부의 선택이 본격화됐습니다. 지주회사·금산분리 규제를 예외적으로 완화해 초대형 투자의 자금 조달 구조를 손질하기로 한 겁니다. 초대형 규모의 반도체 투자를 예고한 SK그룹에는 결정적 전환점이 될 수 있지만 제도 설계 및 공정성, 정책 일관성을 둘러싼 논란도 불가피해졌습니다.
투자 공식이 바뀌다
'600조 규모' 반도체 투자를 앞두고 자금 조달 해법을 찾지 못해 고심해온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한숨 돌릴 만한 신호가 나왔습니다. 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대상으로 지주회사·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공식화, SK하이닉스의 대규모 투자 구조에 실제로 숨통이 트이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번 조치는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금산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언급한 이후 구체화됐는데요. 재계에서는 해당 발언을 반도체 산업을 대상으로 한 규제 완화가 정책 결정 단계에 들어섰음을 시사하는 메시지로 해석해 왔습니다.
지난 11일 기획재정부는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일반 지주회사의 증손회사 의무 지분율을 기존 100%에서 50% 이상으로 완화하는 방안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반도체 업종을 국가첨단전략산업법상 특례 대상으로 규정, 금산분리 원칙에 예외를 두는 방식입니다.
특례 적용 조건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지주회사 체제일 것 △손자회사가 반도체 등 첨단전략산업 기업일 것 △지방 투자를 전제로 할 것 등인데요. 이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기업은 현재로선 많지 않다는 평가입니다.
가장 직접적인 수혜 기업으로는 SK하이닉스가 꼽힙니다. SK하이닉스는 지주회사인 ㈜SK의 손자회사로, 현행 제도 아래에서는 금융 계열사를 보유할 수 없고 투자 전담 회사를 설립하더라도 지분을 전부 보유해야 합니다. 외부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구조적 한계가 뚜렷했던 셈입니다.
이번 규제 완화로 자금 조달 방식도 달라지게 됐습니다. 그동안 손자회사가 투자 회사를 설립하려면 지분 100%를 보유해야 했지만, 앞으로는 지분 50%만 확보해도 설립이 가능해집니다. 나머지 지분은 정책 자금이나 민간 자본으로 채울 수 있게 되는데요. 여기에 새로 설립되는 회사가 제한적으로 금융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되면서 투자 구조 전반의 유연성도 크게 높아졌습니다.
SK그룹에 대입하면 그림이 보다 분명해집니다. 가령 SK하이닉스가 대규모 투자를 위해 별도의 '투자 전담 회사'를 세우고, 여기에 국민성장펀드나 금융권 자금이 함께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이 회사가 공장과 부지를 먼저 마련하고 SK하이닉스는 이를 장기간 임차해 사용하는 구조죠. 수백조원에 이르는 반도체 투자를 그룹 내부 자금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 열리는 셈입니다.
그간 업계에선 환율과 원자재, 반도체 장비 가격이 동시에 오르면서 첨단 팹 1기당 투자 비용이 100조~150조원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돼 왔습니다. SK하이닉스의 연간 수익을 훌쩍 웃도는 자금이 한 번에 투입되는 구조인 만큼 기존 규제 안에서는 투자 속도를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의 공개 발언에서도 확인됩니다. 곽 사장은 지난 10일 대통령실에서 열린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 보고회'에서 "초대형 투자를 단일 기업이 감당하기는 어렵다"며 규제 완화 필요성을 직접 언급했는데요. 그는 "장비를 들여와 세팅하는 데만 3년이 걸리는데 투자가 늦어지면 AI 메모리 수요 확대의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특례'가 '특혜'로 끝나지 않으려면
시장에선 이번 특례가 SK하이닉스의 투자 속도를 실질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SK하이닉스의 올해 시설투자 규모는 20조원대 중반으로 추정되는데요. 내년에는 30조원대로 확대될 가능성이 거론됩니다.
청주 M15X 팹에서 내년 초부터 HBM 양산이 시작되는 가운데 회사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2050년까지 600조원, 청주 지역에 향후 4년간 42조원을 각각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태입니다. 증손회사 지분 요건 완화가 현실화될 경우, 이 같은 초대형 투자 부담이 구조적으로 완화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정부 역시 이번 조치의 명분을 '특정 기업 지원'이 아닌 '산업 전략'에 두고 있습니다. 기획재정부는 민간·정책 자금을 활용한 설비 투자와 장기 임대를 통해 초기 투자 부담을 낮추겠다는 구상인데요.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절대로 금산분리 차원의 완화는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외국인 투자 유치 과정에서도 유사한 규제 완화가 적용돼 왔다는 설명이죠.
하지만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규제 완화의 실질적 수혜 범위가 넓지 않다는 점에서 정책 효과가 일부 기업에 집중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데요.
시민단체들은 SK하이닉스가 회사채 발행이나 유상증자 등 기존 방식으로도 충분히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우량 기업이라는 점을 들어 "굳이 제도까지 손질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문제를 던집니다. 유상증자를 피함으로써 모회사인 SK스퀘어의 지분 희석을 막고, 총수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나옵니다.
반면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번 조치를 보다 구조적인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번 규제 완화는 특정 기업을 위한 특혜라기보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서 나타난 산업 전략적 선택"으로 평가했는데요. "반도체 산업은 설비 투자 규모가 막대하고 기술 주기가 짧아 기존의 경직된 지주회사·금산분리 규제로는 대규모·신속한 투자가 어려웠다"는 설명입니다.
다만 김 교수는 제도 설계의 결과가 일부 기업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점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고 짚었습니다. 그는 "핵심은 누구에게 유리하냐가 아니라 동일한 조건이 다른 기업에도 적용 가능한 보편적 규칙이냐는 점"이라며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산업 정책이 아니라 기업 맞춤형 정책으로 비칠 수 있다"고 지적했죠.
현금 창출력이 충분한 SK하이닉스에까지 특례가 필요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자금의 절대 규모보다는 '조달 구조'의 문제"라는 해석이 뒤따릅니다. 김 교수는 "반도체 초격차 경쟁은 돈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금 조달 구조의 유연성에 달려 있다"며 "회사채나 유상증자 같은 정공법은 비용 증가와 주주가치 희석, 투자 타이밍 지연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고 설명했는데요. 이번 특례의 본질은 자금 부족을 메우기 위한 지원이 아니라 제도가 만들어낸 투자 병목을 해소하는 데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국민성장펀드 등 정책 자금이 투입될 경우, 리스크 배분 문제도 중요한 쟁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 교수는 "현재 구조에서는 정책 자금의 손실 위험이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귀속될 가능성을 완전 배제하긴 어렵다"고 지적했는데요. 손실 분담 구조를 명확히 하고 성과 연동형 회수 장치와 투자 실패 시 정부 책임 범위를 사전에 규정하는 등 제도적 보완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결국 이번 금산분리·지주회사 규제 완화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투자 속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적 선택인 동시에 제도의 공정성과 정책 신뢰도를 시험대에 올려놓은 결정입니다. 법·제도 개편의 구체적 범위와 국회 논의 과정, 공정거래위원회의 심사 기준에 따라 SK하이닉스가 그리는 '600조원 투자 로드맵'의 현실화 속도뿐 아니라 향후 다른 첨단 산업으로의 확산 가능성도 함께 가늠될 전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