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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이 선수로', 수책위 전관예우 후폭풍...독립성 고심하는 국민연금

  • 2025.03.21(금) 09:00

고려아연 임시주총 안건 다룬 후 사외이사 후보로 직행 논란
전관예우 반복시 기금 운용 독립성·책임투자에 타격 불가피
주무부처 복지부도 문제의식 느껴…'규제 수준 검토 필요'

국민연금의 주주권행사를 결정하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이하 수책위) 위원이 임기 만료 직후 국민연금 투자회사의 사외이사 후보에 올랐다가 논란 속 사임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수책위 결성 7년 만에 나온 이례적 사건에 시장에서는 수책위의 핵심 가치인 '독립성'을 위협받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유사한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고 입을 모은다. 다만 고려해야 할 사항도 적지않다. 헌법상 직업선택의 자유를 위배할 여지가 있는 데다가 섣불리 규제를 강화할 경우 수책위가 구인난에 빠질 수 있도 있다는 지적이다.

수책위 출신 고려아연 사외이사 후보, 왜 논란에 휘말렸나

영풍·MBK파트너스와 경영권 분쟁 중인 고려아연 이사회는 지난 13일 정기주주총회 소집공고를 통해 권재열 경희대학교 교수를 포함한 사외이사 후보 8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발표 5일만인 18일 권 교수는 '일신상의 사유'를 들며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사건의 발단이 된 건 권 교수의 직전 이력이다. 권 교수는 2022년 2월 사용자단체의 추천을 받아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비상근)으로 선임됐다.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위원장 보건복지부장관) 산하 전문위원회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와 책임투자 관련 주요 사안을 검토·결정한다. 권 교수는 3년의 전문위원 임기를 마치고 올해 2월 수책위를 떠났고, 곧바로 고려아연 사외이사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문제는 권 교수가 임기 만료 직전인 1월 고려아연 임시주총 안건을 심의했다는 점이다. 경영권을 둘러싼 갈등 수위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다. 수책위는 고려아연 주총 사안이 주주가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판단, 기금운용본부 내 투자위원회로부터 의결권 행사 권한을 넘겨받는 '콜업'을 결정했다. 이후 수책위는 1월 17일 고려아연 임시주총 안건에 대한 의결권 행사 방향을 논의했고, 권 교수도 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핵심 안건은 집중투표제 도입이었다. 집중투표제는 여러 명의 이사 후보가 있을 때 표를 몰아주거나 분산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다. 고려아연 경영진은 영풍·MBK파트너스 측의 이사회 진입을 최대한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집중투표제를 도입하고자 했다. 양측간 지분율 격차가 크지 않았기에 5%의 지분을 보유한 국민연금이 어느 편을 지지할 지 시장의 이목이 쏠렸다. 권 교수를 포함한 수책위원들은 회의 결과 집중투표제 도입에 찬성하기로 결정했고, 고려아연 경영진에 힘을 실어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오는 28일 열리는 고려아연 정기주총은 1월 임시주총 때와 마찬가지로 경영권 분쟁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인 만큼 국민연금이 또한번 수책위에서 의결권 행사 방향을 다루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다. 그러나 바로 직전까지 의결권 행사 방향 논의에 참여한 당사자가 사외이사 후보로 등판하는 사례가 발생하면서 국민연금은 상당한 고심에 빠졌다.

직전까지 심판 중 한명이었던 인물이 선수로 뛰겠다는 상황이 연출되면서, 당시의 심판(1월 임시주총 의결권 행사 방향)이 공정했는지 의문의 여지를 남기게 됐다.

이번 정기주총에서도 국민연금 수책위가 의결권 행사방향을 결정할 경우, 이해상충 논란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피할 수 없는 대목이다. 두 달 전까지 수책위원이었던 후보에 대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 생기는 동시에 만일 수책위가 해당 후보에 찬성표를 던질 경우 유착 의혹이 제기될 여지도 있다.  

연금 관계자는 "고려아연에 의결권을 한번 행사한 위원이 수책위를 나간 뒤 그 회사로 갔다는 것이 문제"라며 "해당 위원(권재열 교수)이 고려아연 안건을 다루지 않았더라면 내부에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아주 예외적이고 특별한 케이스"라고 강조했다. 
 
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이 고려아연 정기주총에 의결권을 행사할 경우 잃을 게 많을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행동주의 펀드는 본인이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할 수도 있고 선임에 찬성을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국민연금은 공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처럼 기존주주 이익 침해가 명확한 사안이라면 모를까, 경영권 분쟁에 관한 사안에 표결을 해서 얻는 이익보다 오히려 평판훼손 리스크가 크다"고 덧붙였다. 

사퇴했지만 여진 남아…임기마친 수책위원 규제 없어 

논란 끝에 권 교수는 결국 사외이사 후보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진은 남아있다. 이번 사례는 수책위가 추구해온 최고의 가치인 '독립성'에 균열이 생길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수책위는 2018년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 의결권 지침)를 도입하면서 기금운용위 산하에 설치한 전문위원회다. 상근 위원 3인과 비상근 위원 6인 등 총 9명으로 구성한다. 사용자단체, 근로자단체, 지역가입자단체로부터 추천을 받는다. 수책위 스스로 설립 때부터 기금이 정치적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도록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지난 2023년 정부가 수책위원 9명 중 3명을 전문가단체 추천을 받기로 하자 정부 입김이 커질 것이란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만큼 독립성은 수책위 활동에서 중요한 가치다.

유사한 사례가 또 다시 발생한다면 국민연금의 책임투자 신뢰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기금운용에 정통한 학계 전문가는 "이해상충 논란을 문제삼아 수책위의 판단에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우려가 나오고, 결국 책임투자에 반대하는 논리로 쓰일 수 있다"고 말했다. 

재발방지를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빠지지 않는다. 기금운용위 및 수책위 운영규정에 따르면 의결 사항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위원은 스스로 안건 심의, 의결을 회피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사례처럼 임기를 마친 위원에 대해선 따로 규제가 없다. 권 교수가 수책위를 떠난 직후 고려아연 사외이사 후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기금운용위와 수책위를 관리하는 보건복지부도 검토 필요성을 인정했다.

다만, 규제 수준에 대해선 섬세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헌법상 직업선택의 자유를 과하게 규제해서는 안되는 데다가 수책위의 의결권 행사 논의 대상이 많지 않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금 관계자는 "제척이나 상호견제를 통해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며 "위원은 추천직이고 또 대부분 비상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지나치게 엄격한 제한을 두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과도한 규제는 오히려 전문성과 대표성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핀셋 규제가 적합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학계 전문가는 "수탁자책임은 민감한 사안을 다루다 보니 위원들이 보유 자산도 모두 확인받는 것으로 안다"며 "그러나 임기종료 후에는 별다른 규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다고 해서 퇴사자의 사외이사직 이동을 일률적으로 막을 경우 수책위를 하려는 전문가를 뽑기 어려워진다"며 "광범위한 규제보다는 이해상충 우려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세밀한 규제가 필요한데 쉽지 않은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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