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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명성을 혼동하는 사회

  • 2014.10.10(금) 10:14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남의 시선을 무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처럼 연고주의, 정실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됨됨이나 능력보다 허울이나 간판을 중시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세상의 평판을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면 허위의식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내면의 명예보다 외부의 명성만을 추구하다보면 까닭 없이 초조해지고 정체 모를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최근 발생하고 있는 저명인사들의 어이없는 성도착이랄까 성추행 사건은 그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사회병리현상으로 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명예와 명성을 혼동하는 분위기에서는 지도층일수록 수치심이나 죄의식을 상실하기 쉽기 때문이다.

명예(Honor)는 마음속에 저절로 새겨지는 자아의식 같은 것이어서 일부러 꾸미거나 덧칠할 수 없다. 명성(Fame)은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로 요란하게 색칠되다가도, 공연스레 먹칠되기도 한다. 명예를 지키려면 절제된 행동거지가 요구되지만, 명성을 얻으려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자극하고 혀를 움직이게 하여야 한다.

명예로운 사람은 자신을 지킬 수 있어 이 세상 파도에 초연할 수 있지만, 명성을 탐닉하다보면 궤변을 일삼으며 남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부화뇌동하기 쉽다. `거짓신념`에 차 있는 인사들일수록 `편 가르기`에 쉽게 물들고, 상황에 따라 논리를 바꾸다가 결국 변절하곤 한다. 구한말 이후 한국의 근현대사는 부화뇌동과 변절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명세를 크게 타는 인사일수록 남의 관심에서 벗어나면 쉽게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은 아마도 명성에 버금가는 명예가 뒷받침되지 못하기 때문일 터이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기웃거리다 고관이 된 어떤 인사는 투기 의혹으로 낙마하자, 차를 마시면서도 남의 시선을 살피느라 쉴 새 없이 눈알을 360도 굴리는 처연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을 홍보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내면은 단련시키지 않은 탓이다. 목욕은 하지 않고 그저 분칠만 해댄 꼴이다.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는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마음 속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사람들은 흔히 순간의 명성을 위해서 평생 동안 간직할 명예를 저버리는 실수를 자주 저지른다. 유명인사의 박사 논문표절과 학위취소 판정, 불복소송 같은 일련의 사태를 생각해보자. 남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포장할 수는 있지만, 양심의 구멍까지도 대신 메우게 할 수는 없다.

명성을 쫓는 인사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바지에 오물이 묻으면 보통사람들은 훌훌 벗고 털어낸다. 그러나 허상인 명성에 전전긍긍하는 인사들은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까 두려워 억지로 오물을 숨기려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고약한 냄새를 풍기게 마련이다.

19세기말 허무주의 시대에 니체(F. Niche)는 "헛된 명성을 즐기는 자는 자신을 속이며 도취되기도 하지만 마음구석에는 자신의 본 모습이 밝혀질까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하였다. 또 20세기 전후시대(戰後時代)에 리스만(D. Riesman)은 "내면의 단련 없이 외부세계를 지향하다보면 수치심이나 죄의식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떳떳치 못한 실체가 대중에게 드러날까 두려워 불안과 번민에 시달리게 된다"고 하였다. 성철스님은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지 말라"는 불기자심(不欺自心)을 강조하였다. 스님의 법어집 `자기를 바로 봅시다`는 한마디로 외면의 명성이 아니고 내면의 명예를 강조하라는 뜻으로 요약할 수도 있다.

자아의식인 명예보다 타인의 평판인 명성에 매달리게 되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는 거추장스러운 장식물로 변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물론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없어지기 때문에 사회악이 번지기 쉽다. 오늘날 세상을 어지럽히는 불상사들 대부분은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책임의식 실종이 그 원인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명예가 무엇인지 모르고 나아가 명성에 금이 가도 다시 말해, 염치도 모르고 체면도 모르는 광경들이 늘어나고 있다. 소위 상류사회 인사들에게서 파렴치한 모습들이 두드러진다. 수치심이나 죄의식은 차치하고 불안이나 번민조차 느끼지 못하는 막장사회로 가고 있는 것인가? 국민소득이 높아져도, 많은 한국인들이 더 불안하다거나 불행해졌다고 느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명예와 명성을 혼동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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