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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강원국의 `직장인의 말하기·글쓰기` ②

  • 2016.11.25(금) 16:15

회장님, 그게 그렇게 억울하십니까?
'주파수를 맞춰라'
회장 아무나 하는 줄 알았더니…
"구조조정 말고 혁신한다고 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를 불러온 최순실 게이트는 최순실 씨가 대통령 연설문에 손을 댄 사실이 알려진 게 도화선이 됐다. 대통령 연설문이 중요한 것은, 연설문의 내용이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연설문 토씨 하나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 최순실 게이트로 대통령 연설문 쓰기의 엄중함을 알려준 책 `대통령의 글쓰기`가 최근 들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책은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에서 8년 동안 대통령의 말과 글을 쓰고 다듬은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이 2014년 2월에 펴냈다.   

저자는 같은 해 12월 `회장님의 글쓰기`도 발간했는데, 이에 앞서 비즈니스워치에 40회(2014년 7월~9월)에 걸쳐 `직장인의 말하기·글쓰기`를 연재했다. `직장인의 말하기·글쓰기`는 `회장님의 글쓰기`의 초본인 셈이다. 글쓰기의 중요성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반영,  2년 전에 게재했던 원고를 10회 분량으로 편집해 다시 싣는다. [편집자]
 
 
회장님, 그게 그렇게 억울하십니까?

억울한 회장을 위한 변명


회장이 거나하게 취했다. “강 상무, 회장이라고 마냥 좋을 것 같지? 억울한 게 회장이야.” “뭐가 억울하신데요?”


“내가 모르는 줄 알아? 나 없는 데서 내 욕하는 거. 하지만 회장에게는 해명할 기회가 없잖아. 늘 일방적으로 당하는 거지.”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하다. 한 부서 안에 대리와 과장이 있다고 하자. 대리가 한 일이 미진하다고 생각하면 과장이 묻는다. 그러면 대리는 여차저차 해서 그렇다고 설명한다. 해명의 기회가 있는 것이다. 이는 과장과 차장, 차장과 부장 사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과장은 차장에게, 차장은 부장에게 자신의 처지를 이해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 반대 방향은 성립이 안 된다. 과장은 ‘차장의 생각이 이럴 거야.’ 일방적으로 추측한다. 차장은 ‘부장이 어떤 의도로 저런 일을 하고 있어.’라고 판단한다. 윗사람은 모른다. 아래에서 무슨 생각과 판단을 하고, 무슨 불만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으니까. 당연히 해명과 변명의 기회도 없다. 하물며 정점에 있는 회장은 오죽 하겠는가.

술자리가 길어져 회장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됐다. 기사와 함께 부축하고 차에 태우려는 순간, 회장이 푸념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한마디를 내뱉는다. 

“나도 직원들에게 혼나고 싶어.”

억울한 게 하나 더 있는 것이다. 회장만 죽어라고 일한다. 그게 억울하다. 자기도 쉬고 싶다. 그런데 회장만큼 고민하는 직원이 없다. 회장도 태어날 때부터 일벌레는 아니었다. 문제는 직원들이다. 하는 짓을 보면 마음이 안 놓인다. 못미더우니 사사건건 관여한다. 참견하면 할수록 직원들은 회장님 입만 쳐다본다. 

겉으로 보면 일사분란하고 매끄럽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회장은 역시 내가 나서야 일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바삐 움직인다. 회장이 종횡무진 하니 직원들은 더욱 더 회장만 바라본다. 그래서 회장도 직원들에게 혼나고 싶단다. ‘회장님, 일을 그 정도 밖에 못하시겠습니까. 제가 한번 보여드려요?’

회장 혼자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회장 차 앞좌석에 앉았다.

 

“화내는 놈들이 없어.”

회장이 세 번째 억울함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회사생활에서는 화가 나야 정상이다. 뭔가를 잘해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스스로에게 내는 화, 몸담고 있는 조직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안타까워 내지르는 화, 이 모두가 발전을 위한 좋은 에너지다.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화낼 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십중팔구 열정이 사그라졌거나 무사안일, 적당주의 함정에 빠진 사람이다. 고상한 사람이라 화내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눈에 뻔히 보이는 문제를 보고도 외면할 사람이다.

무엇인가 개선하고 발전하려는 조직에서 어떻게 화낼 일이 없을 수 있는가? 아무도 화내지 않는 조직, 그것은 역동성을 잃어버린 조직이다. 심하게 얘기하면 죽은 조직이다. 적어도 살아있는 조직이라면 큰소리도 나고 때로는 격한 논쟁도 벌어져야 한다.

화내는 것은 회장의 전유물이 아니다. 개선과 발전의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화를 낼 수 있고, 화내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회장만 화를 내고, 회장만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느냔 말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회장이 자초한 일이다. 억울해 할 일 아니다.


첫 번째 억울함부터 보자. 직원들이 독심술을 배워 회장님 속을 들여다 볼 순 없지 않은가? 왜 직원들이 묻기를 기다리나? 먼저 물어보지. 그리고 변명이건 해명이건 하면 될 일이다. 그게 소통이란 것이다.

두 번째야말로 억울해도 싸다. 잘못된 리더십의 문제니까. 켄 블랜차드(Ken Blanchard)의 유명한 책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에 이런 말이 나온다. ‘도망가는 죄수를 잡는 스포트라이트처럼 잘못한 것에 집중하여 그것을 강조하면 할수록 더욱 잘못할 가능성이 커지고 부정적인 힘만 키운다.’ 길게 얘기 않겠다.

세 번째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강요할 일은 아니다. 그저 회장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고, 사람들이 ‘회장님, 회장님’ 하는 것이다.


 

 
'주파수를 맞춰라'
회장 측근이 되는 네 가지 방법


회사에 이런 직원 한둘은 꼭 있다. 일은 죽어라고 하는데 승진은 안 되는 직원, 성과 좋고 역량도 나쁘지 않은데 늘 눈치 없다고 핀잔 듣는 직원 말이다.

이유는 하나다. 주파수를 못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다리 열심히 긁고 있는 것이다. 주파수 맞추기는 회사생활의 거의 전부다. 하지만 쉽지 않다. 회장의 진짜 생각과 하는 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회장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과 표현하는 게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주파수를 맞출 것인가.

첫째, 회장의 말과 글 속에는 반드시 의중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의중은 실제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그래야 보인다.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게 의중이기 때문이다.

'의중'과 관련하여 누구나 잘 아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에게는 다테마에(建前,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 겉치레)와 혼네(本音, 속내, 본심)가 있다고 한다. 바로 혼네가 ‘의중’이다.

니즈(Needs, 필요한 것, 결핍, 필요조건)와 원츠(Wants, 원하는 것, 욕구, 충분조건)도 같은 맥락이다. 두 단어 모두 뜻은 비슷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파 먹을거리를 찾는 것은 니즈다. 이에 반해 원츠는 많은 먹을거리 중에 진짜 먹고 싶은 것이다.

또한 니즈는 겉으로 드러나지만, 원츠는 꽁꽁 숨겨져 있다. 자기 술잔이 비었을 때, 술을 달라고 말하는 것은 니즈에 해당한다. 하지만 상대에게 한잔 하라고 권하는 것은 원츠를 표현한 것이다.

꼭 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니즈와 원츠를 회장 의중에 대비시켜 보겠다. 니즈는 우리나라 회장이라면 누구나 가져봄직한 바람, 희망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이미 드러나 있다. 이에 반해 원츠는 내가 모시고 있는 회장만의 바람, 욕망이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바로 이 원츠가 회장의 의중이다.

둘째, 행간을 읽어야 한다.

말과 글은 그 자체만으로 머릿속 생각을 100% 전달하지 못한다. 말은 표정이나 손짓, 태도, 분위기가 의사 전달에 있어 큰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말을 들을 때는 단지 소리만 들어서는 안 된다. 유심히 봐야 한다.

글은 이러한 보조수단조차도 없다. 내용과 전후 문맥이 전부다. 철저히 글로만 회장의 뜻을 파악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행간 읽기다. 겉으로 드러난 표현 말고 그것을 쓴 의도를 읽어야 한다. 진짜는 행간에 있다.

신경을 곧추 세워 듣고 읽어야 한다. 나아가 24시간 안테나를 세우고 있어야 한다. 회장 생각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회장의 최근 관심사가 무엇인지 읽는 데 푹 빠져 살아야 한다. 이런 것 잘하는 사람 욕하지 마라. 그것이 실력이다. 판을 읽는 능력이다. 삼성 같은 조직에서 회장 비서 출신이 출세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셋째, 자신 없으면 물어봐라.

중간은 따라간다. 물어보는 성의라도 있는 직원을 회장은 좋아한다. 적어도 자기 말을 무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니까.  

회장이 누구인가? 돈은 가질 만큼 가졌다. 하지만 고독하다. 누군가 자기 곁에 찰싹 달라붙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회장이 못 가진 것, 그래서 갖고자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두려워말고 물어라. 자주 물어봐라. 묻기 전에 먼저 물어라. 틀림없이 친절하게 가르쳐줄 것이다. 회사 안에서 사고가 났을 때, 회장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왜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는가.’이다.

실패한 것은 죄가 아니다. 물어 보지 않은 것이 큰 죄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친구들이 바로 이 점을 간과한다. 머리 좋은 친구들이 여기에 걸려 넘어진다. 아무리 오디오 성능이 좋아도 주파수를 못 맞추면 잡음만 들린다.

넷째, 가장 중요한 것은 충성심이다.

충성의 한자 풀이가 어떻게 되나. 충(忠)은 마음(心)의 중심(中), 즉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요, 성(誠)은 말(言)로써 이룬다(成), 즉 언행일치하고 진실하다는 뜻이다. 누가 자기에게 정성과 진심을 다하는 사람을 멀리 하겠는가. 회장은 본능적으로 안다. 누가 자기를 좋아하고 존경하는지. 그런 사람은 행간을 읽을 필요도, 물어볼 필요도 없다.

물론 눈치 안 보고 소신껏 일하는 직원이 있다. 실력으로 승부하고 실적으로 평가받겠다는 직원들이 그들이다. 그런 직원이 되고 싶은가? 속지 마라. 그것만 해서 성공한 직원은 없다. 그런 직원은 회장의 의중과 행간도 잘 읽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충성도 잘 한다.

만약 그런 것 없이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성공한 사람이 있고,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이다. 드라마 주인공은 다 그렇게 성공한다.

 

회장 아무나 하는 줄 알았더니…
크게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내가 경험한 두 가지 이야기다.

이야기 하나.
대학에 들어가고 첫 번째 여름방학을 맞았다. 고향 전주에 내려왔다. 서울 상경 5개월 만의 귀향이었다. 할 일 없이 뒹굴뒹굴 하다 책꽂이에서 고등학교 때 배운 정치경제 교과서를 빼들었다. 어찌나 활자가 크고 책 두께는 얇아 보이든지. 이런 책을 일 년 동안이나 배웠단 말이야! 왠지 속아 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지 불과 6개월. 그사이 배웠으면 뭘 얼마나 배웠다고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 안목이 변한 것이다. 6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서 새롭게 보는 눈이 생긴 것이다. 

이야기 둘.
대우증권에서 10년 가까이 일하다 대우 회장비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당시 전경련 회장이던 김우중 회장의 연설문 쓰는 일을 하게 됐다. 엄밀히 얘기하면 보조 업무였다. 그럼에도 특권을 누렸다. 회장 주재 회의에 배석하는 영광(?)이었다. 주간 혹은 월간으로 열리는 그룹 사장단 회의나 회장단 회의에 들어갔다. 일개 과장은 나 혼자였다. 아니 회장이나 사장이 아닌 사람은 나뿐이었다. 가까이서 회장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3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 회장 비서실이 문을 닫고 나는 대우증권으로 복귀했다. 왜 그렇게 대우증권이 작아 보이던지. 불과 몇 년 전까지 내 세상의 전부였던 대우증권이 내 손바닥 위에서 훤하게 보이는 게 아닌가.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대로다. 내가 변한 것이다. 그렇다고 역량이나 실력이 늘어난 것도 아니다. 위에서 보는 것과 아래에서 본 것의 차이일 뿐이다. 사원의 눈이 아니라 회장의 눈으로 보게 된 것 뿐이다. 대학 때 경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 한자 한자에 파묻혀 달달 외웠다. 매몰돼 산 것이다. 대학에 가서 정치학 개론서를 봤다. 국한문 혼용에다 작은 활자를 보는 게 힘들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안목이 커졌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눈이 생겼다. 내용 하나하나가 아니라 목차를 보게 된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에 매몰되면 안 된다. 글을 장악해야 한다. 글 앞에서 쩔쩔 매면 글이 그것을 안다. 나를 얕잡아 본다. 그런 상태에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안절부절 시간만 흐를 뿐이다.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글을 다뤄야 한다. 기계 다루듯이 다뤄야 한다. 글 아래 묻히지 말고 위에서 호령해야 한다. 

글 쓰는 자세만이 아니다. 글감을 찾는데 있어서도 위에서 보는 것과 아래에서 보는 것은 천양지차다. 위에서 봐야 보인다. 각론이 아니라 총론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판을 읽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전체를 정의하고 규정할 수 있다. 

회장이 말했다. "회사가 잘 되는 방법이 뭔 줄 아나? 부서장은 자기 부서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 본부장은 자기 본부의 발전을 위해 힘쓰고, 사장은 회사, 회장은 그룹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뛰면 잘 되지 않겠나?"

그렇다고 했더니 회장이 틀렸다고 한다.

"만약에 회장은 그룹, 사장은 회사, 본부장은 본부, 부장은 부서를 위해 일하면 부서원들은 무엇을 위해 일하지? 결국 자기를 위해 일하지 않겠나? 결과적으로 모든 직원들이 자기만을 위해 일하게 되는 거지. 왜 암이 나쁜 줄 아나? 자기 증식만을 위해 살기 때문이야.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정상적인 신체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네. 유독 암세포만 자기를 위해서 일하지. 그러니까 앞서 얘기한 대로 회사가 돌아가면 직원들이 모두 '암적인 존재'가 되는 거지."

회장의 답은 간단하지만 깨우침이 있었다.

"사원은 부서 발전을 위해 일하고, 부서장은 본부 발전, 본부장은 회사 발전, 사장은 그룹 발전, 회장은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일해야 하지. 그런 회사는 자연히 잘 될 수밖에 없게 되지."

회장은 역시 회장이다. 크게 볼 줄 안다. 크게 볼 줄 아는 게 회장이다.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사람은 지금 당장 회사를 때려치워라. 나가서 회장할 수 있다. 큰 안목이 가장 중요한 회장의 덕목이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다. 그렇게 안목 높은 회장이 왜 글은 못쓸까?

 

 
"구조조정 말고 혁신한다고 해"
단어 하나의 힘


오래 전이다. ‘구조조정’이란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지던 시절이다.

회장이 말하기를 직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줄인다고 한다. 문제는 ‘구조조정’이란 말은 쓰지 말란다. ‘구조조정’을 쓰는 순간, 회장은 ‘저승사자’가 되는 분위기였다.

일개 과장이었던 내가 아이디어를 냈다. ‘혁신’이란 말을 쓰자. 당시 기업에서 ‘혁신’이란 단어는 좀처럼 쓰지 않았다. ‘변화’가 주로 쓰였다. 회장이 무릎을 쳤다. 그래 ‘혁신하자!’ 

사실 나는 지금도 ‘구조조정’과 ‘혁신’의 뜻이 헷갈린다. 대기업이나 공기업 CEO들이 새로 취임했을 때나 새해 계획 등을 밝힐 때 보면 이런 말을 하곤 한다.

“혁신을 통해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겠다.” “구조조정을 일상화하여 혁신역량을 강화하겠다.” 두 문장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단어는 ‘혁신’ 과 ‘구조조정’이다. 그런데 순서는 정반대다.

첫 번째 문장은 통상 쓰는 표현이기 때문에 이해가 쉽다. 혁신을 해서 돈 잘 버는 구조로 만들어 가겠다는 뜻일 게다. 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무슨 뜻일까? 추측해 보면 이렇다. 논에 메기를 풀어놓으면 미꾸라지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더 튼튼하게 되는 것처럼, 구조조정을 일상화하면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혹은 돈 안 되는 사업부문 매각 등으로 조직 자체가 정리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혁신을 꾀하게 된다는 말인 것 같다. 이처럼 ‘혁신’ 과 ‘구조조정’은 앞뒤로 순서를 바꿔 써도 말이 될 만큼, 섞여 쓰이고 있다.

혁신과 구조조정의 차이는 무엇일까?

목표라는 측면에서 보면 혁신과 구조조정은 다르지 않다. 경쟁력이나 체질을 강화하자는 것이니까. 방법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실이나 거품, 비효율 제거, 비용 감축,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 재무구조 개선 등등이 혁신이나 구조조정에 같이 쓰이는 방법들이니까. 

그러나 두 단어가 어감의 차이는 분명 있다. 혁신이란 말에서는 왠지 긍정적, 적극적인 냄새가 난다면, 구조조정이란 말에는 부정적인 느낌이 많다. 왜 그럴까? 

우선, 위기 발생 이전인가, 이후인가를 갖고 구분해서 쓰는 것 같다. 위기가 현재화되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취하는 조치는 구조조정이고, 위기 이전에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활동은 혁신이라고 쓴다. 따라서 어디에선가 발생할지 모를 잠재적 부실에 미리 대응하는 게 혁신이라면, 이미 발생한 부실을 도려내는 게 구조조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하나 차이는 혁신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반해, 구조조정은 상황에 떠밀려서 타율적으로 진행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구조조정 과정이 혁신에 비해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게 된다. 혁신과 구조조정 모두, 현상 유지가 아니라 변화를 꾀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양보와 희생이 없을 순 없지만. 

혁신이 운동이나 식이요법에 해당한다면 구조조정은 수술대 위에 올라 메스를 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할까? 그러니 더 아프고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이렇게 정리가 가능할 것 같다.

첫째, 혁신과 구조조정은 목적이나 방법론에 있어 큰 차이가 없다.

둘째, 다만, 위기 이전과 위기 이후를 기준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셋째, 혁신이 자발적이라면 구조조정은 강제적이다.

넷째, 평상시에 혁신을 게을리 하면 구조조정을 당할 수 있다.

다섯째, 혁신에 비해 구조조정은 더 고통스럽고 부정적이다.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회사가 가고자 하는 길에 걸림돌이 될 수도, 디딤돌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반대로, 회사가 아니라 직원 편에 서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글의 힘이다.

‘혁신’이란 단어를 회장이 채택했을 때 무척 뿌듯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줬다. 글 팔아먹고 사는 게 이런 것인가? 못된 짓 참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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