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포스트]강원국의 `직장인의 말하기·글쓰기` ⑥

  • 2016.11.28(월) 17:05

"차라리 감방에 가라고 해!"
제발, 애사심 갖자는 얘기 좀 하지 맙시다
회장은 왜 거짓말을 하는가
남자이자 여자인 회장과 동거하는 법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를 불러온 최순실 게이트는 최순실 씨가 대통령 연설문에 손을 댄 사실이 알려진 게 도화선이 됐다. 대통령 연설문이 중요한 것은, 연설문의 내용이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연설문 토씨 하나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 최순실 게이트로 대통령 연설문 쓰기의 엄중함을 알려준 책 `대통령의 글쓰기`가 최근 들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책은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에서 8년 동안 대통령의 말과 글을 쓰고 다듬은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이 2014년 2월에 펴냈다.   


저자는 같은 해 12월 `회장님의 글쓰기`도 발간했는데, 이에 앞서 비즈니스워치에 40회(2014년 7월~9월)에 걸쳐 `직장인의 말하기·글쓰기`를 연재했다. `직장인의 말하기·글쓰기`는 `회장님의 글쓰기`의 초본인 셈이다. 글쓰기의 중요성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반영,  2년 전에 게재했던 원고를 10회 분량으로 편집해 다시 싣는다. [편집자]

 

 

"차라리 감방에 가라고 해!"

회장 없어도 잘 돌아가는 회사 만들기

 

그날 하마터면 짤릴 뻔했다. 회장을 좀 쉬게 해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조직과 회장 모두의 건강을 위해서 그래야 한다는 일념에서였다.

 

회장님, 건강도 살피실 겸 회사에 계시는 시간을 좀 줄이시죠.”

 

자네 지금 나보고 물러나란 소린가?”

 

그런 말씀이 아니고... 회장님 건강을 생각해서...”

 

아니 그 소리가 그 소리 아닌가. 차라리 깜빵에 가라고 하지. 거기 가면 건강 잘 챙겨줘. 제때에 밥 먹지, 휴식 충분히 하지, 운동까지 시켜줘. 나 깜빵갈까?”  

 

그때 알았다. 회장은 우리와 다른 인간이다. ‘그 정도 돈 있으면 편히 살겠다.’는 우리와 다르다. 일하는 게 즐거운 인간이다. 끝없이 욕망하는 인간이다. 달리 얘기해야 했다. 사적으로 슬쩍 건의한 방식도 잘못됐다. 며칠간 회장은 말이 없었다. 나는 투명인간이 됐다. 만회가 필요했다. 충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정식으로 보고 시간을 잡았다.

 

서두를 꺼냈다어떤 사람들은 요즘 시대야말로 CEO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CEO가 더 관여하고 진두지휘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위임이 최고의 경영기법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지요. 사실 CEO의 개입 강도가 어느 정도여야 좋은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CEO가 회사 일의 세세한 부분까지 관여하는 것, CEO가 나서지 않으면 회사가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고, 개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해법이 ‘신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뢰가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 CEO가 덜 피곤합니다. 그러나 신뢰가 있는 조직을 만드는 방법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고민이 필요합니다. 다만, 오늘은 신뢰가 있으면 왜 CEO가 덜 피곤한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CEO가 갈등의 해결자로 나서는 수고를 덜 수 있습니다. CEO의 역할 중에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만드는 것이 바로 부문 간 갈등을 봉합하는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전에 갈등을 예견하고 방지해야 하기도 하고요. 특히 지금과 같이 변화와 혁신을 시도할 때에는 조직 내 갈등이 더 커지게 됩니다. 내가 잘못을 인정하면 나만 바보 되고 끝나는 것 아니야? 내가 이것을 양보하면 나만 손해보고 마는 거 아냐? 나만 열심히 하면 뭐 해,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 부서가 저 부서를 위해 이런 노력을 한들 그들이 과연 알아줄까? 상호간의 신뢰를 통해 이런 보이지 않는 갈등을 풀 수 있다면 CEO는 한결 여유를 가질 수 있겠지요.

 

CEO가 방향 제시자로 나서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습니다. 신뢰가 있는 조직은 대개 비전을 공유합니다. 정보의 흐름이 원활합니다. 회사 사정을 투명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서로 잘 압니다. 정해진 룰에만 의존하려 하거나 윗사람의 지시 뒤에 숨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스스로 고민합니다. 그리고 주변 동료들에게 같이 잘해보자고 격려합니다. 바로 신뢰의 힘입니다.

 

어느 유명한 경영학자가 실증적으로 연구한 결과라는데요. 조직원들은 스스로 선택한 일에 대해 다섯 배의 애착과 실행의지를 갖는다고 합니다. 회장님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조직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입니다. 그게 회장님이 원하시는 것 아닙니까?

 

마무리로 들어갔다. 그런데 회장님, 이런 위임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기술과 철학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무엇을 위임하고, 누구에게 위임할 것인지를 찾아내는 분별력, 그리고 과감하게 넘겨줄 수 있는 결단력 말이죠.

 

회장이 한 마디 한다. 이 사람아, 내가 그 정도도 안 되는 줄 아나?”

 

 

 

제발, 애사심 갖자는 얘기 좀 하지 맙시다

금기(禁忌)에 도전하는 재미 

 

오늘도 회장에게 불려갔다. 그룹 신입사원 교육에서 애사심을 갖지 마라고 한 발언이 문제였다.

 

자네 그게 무슨 소리야?” 

 

회장의 호통이 이어졌다

 

자네, 애사심 의미를 알기나 해? 회사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거야. 회사와 같은 방향을 보는 거란 말이야. 그게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돼. 그게 있어야 기업이 지속 가능할 수 있어. 단합, 책임감, 충성심 이 모든 것의 밑바탕이기도 하고. 그런 애사심을 갖지 말라니, 당신 제정신이야?”

 

나 제정신 맞다. 낙인이론(labelling theory)이란 것이 있다. 규범을 근거로 누군가를 일탈자로 규정하여 낙인찍음으로써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달성하는 현상을 말한다.

 

회사 안에서도 이런 낙인찍기가 횡행한다. 끊임없이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게 바로 그것이다. 회사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즉 애사심에 관한 질문이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곧장 낙인이 찍힌다. ‘저 친군 애사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라고.

 

대놓고 물어봐주기라도 하면 고맙다. 보통은 직접적으로 묻지 않는다. 교묘하게 물어본다. 예를 들면, ‘회사가 먼저냐, 가정이 먼저냐?’ 회장이 좋아, 아내가 좋아 하는 식이다. 둘 다라고 할 수도 없고. 이 뿐만이 아니다. 갑자기 부서 회식 잡아놓고 오늘 회식 참석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참석하면 애사심이 있는 것이고, 선약이 있어 불참하면 애사심이 없는 것이다. 계열사 상품을 팔아주는 캠페인이 벌어졌을 때, 자기 일 제쳐놓고 거기에 몰두하면 애사심이 있는 것이고, 자기 일 열심히 하면 애사심 없는 것이다. 계열사 상품 팔아주기가 엄연한 편법이지만 회장님 관심사여서 그렇다.

 

강요된 애사심은 세 가지 폐단을 낳는다.

 

첫째, 무능하고 나태한 사람의 방패 역할을 한다. 나만큼 애사심 강한 사람 없다.’는 것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감춘다. 어쩌면 자기도 모를 것이다. 그 말 뒤에 자신이 숨어 있다는 걸. 애사심의 갑옷으로 무장한 상사는 아래 직원에게도 애사심 잣대를 들이댄다. ‘당신은 능력도 있고 다 좋은 데 애사심이 부족해. 그게 문제야.’ 마치 무오류의 심판관처럼.  

 

둘째, 소모적 다툼만 일으킨다. 기업은 실질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추상적인 정체성 싸움 하는 데가 아니다. 사상 검증하는 곳은 더더욱 아니다. 회사를 사랑하는지 여부를 두고 얘기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 회사를 사랑하는 직원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직원은 악이라는 뻔한 결론만 있을 뿐이다. 회사를 사랑하는 방안을 놓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것이 생산적이다. 애사심으로 무장한 직원들만이 가득한 회사를 상상해보라. 획일화된 목소리에 찬양 일색일 가능성이 크다

 

셋째, 회사 잘못을 눈감아 주는데 쓰인다. 비리와 탈법도 이 모두가 회사를 위하는 일이라는 애사심으로 화장하면 통과된다. 애사심이 최고의 가치가 되면 그렇다는 얘기다. 나아가 애사심은 변화와 개혁에 걸림돌이 된다. ‘내가 어떻게 해서 만든 회사인데라는 말 앞에서 새롭고 다양한 생각은 설 땅이 없다 

 

과거에 애사심은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주술로써 큰 힘을 발휘했다. 회장도 군사부일체의 끝자락 정도는 차지했다. 하지만 이젠 먹히지 않는다. 회사는 먹을거리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회장은 더 이상 너그러운 존재가 아니다

 

애사심보다는 소속감이 필요하다. 나는 왜 이 회사에 다니는가?’ 스스로 묻고 답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업의 핵심가치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깃발이다. 액자 속에 넣어두는 것은 의미 없다. 직원들이 그렇게 느껴야 한다.

 

말길을 열어 끼어들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 투명하게 공개하고 참여시켜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조직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 잘나가는 사람은 신경 쓸 것 없다. 소외돼 있는 사람을 끼워줘야 한다. 포퓰리즘이 아니다. 버리지 않을 거면 챙기는 게 맞고, 모든 문제는 이를 소홀히 하는 데서 생기기 때문이다.

 

 

회장은 왜 거짓말을 하는가

거짓말쟁이 회장의 다섯 가지 유형

 

거짓말에 관한 어린 시절 추억 두 가지.

 

예닐곱 살 더운 여름날, 이모가 우리 집에 들렀다. 사줄 테니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얘기해 보란다. 나는 형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종류대로 외쳤다. 다 듣고 난 이모. 생각만 해도 즐거웠지 않느냐고 한다. ‘이란다. 아무리 노처녀 신분이었지만 어린 조카에게 할 장난인가. 하지만 이모 말대로 잠깐은 행복했다.

 

초등 3학년 때 백일장에 나갔다. 지역신문에서 주최하는 꽤 큰 규모의 글짓기 대회였다. ‘즐거운 우리집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다. 난데없이 최우수작에 선정돼서 주최한 신문에도 실린단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거짓말로 글을 썼기 때문이다당시 우리집은 즐겁지 않았다. 집에 수영장도 없었다. 혼날 각오를 하고 신문 나오는 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웬일인가. 아버지가 칭찬해 주셨다. 거짓말이 아니라 창의력으로 본 것이다. 글이 반드시 논픽션일 필요가 없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회사에서는 다르다. 회장이 가장 싫어하는 게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자신을 얕잡아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무시당하는 건 참지 못한다. 정작 회장 본인들은 어떨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 양심의 가책이란 없다. 전쟁터와 같은 경영 현장에서 정직만이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짓말을 옹호하는 말들은 참 많다. 플라톤은 거짓말쟁이야말로 창의적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영국의 처칠도 전쟁에서 진실은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에 항상 거짓말이라는 보디가드들에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우리 사회는 기업인의 거짓말에 관대하다.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하면 응당 검토하고 있군.’하고 새겨듣는다. 도리어 정직한 기업인이 낯설다.

 

거짓말의 종류도 다채롭다.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인가 아닌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인가 아닌가, 나쁜 의도인가 선한 뜻인가에 따라 거짓말을 분류할 수 있다. 회장의 거짓말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 배려형 거짓말

자신에게 이익 되는 건 없다. 직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선의의 거짓말이다. ‘희망은 가장 위대한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던가. ‘내가 눈 여겨 보고 있는 거 알지?’, ‘당신만 믿네.’, ‘힘든 고비는 넘겼다. 희망이 보인다.’ 이런 거짓말에는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애정이 묻어있다. 한국인 특유의 인정이 스며있다. 플라시보 효과도 있다. ‘거짓말도 잘하면 논 닷 마지기보다 낫다.’는 속담에 해당하는 흰색 거짓말이다.

 

2. 습관형 거짓말 

자신이나 직원 모두에게 이익도 피해도 없다. 대개는 하는 줄도 모르고 한다.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회장이 입에 달고 사는 회사가 위기다.’도 그중 하나. ‘언제 밥 한번 먹자.’ ‘모두가 여러분 덕분이다.’ 등은 윤활유 역할을 한다. 진실만 말하면 삭막하다. 양념 같은 거짓말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 젖는 법. 과하면 양치기 회장이 될 수 있다. 사심이 없듯이 색깔도 없다.

 

3. 과시형 거짓말 

자신에게는 이익이고 직원에게 피해는 없다. 관심을 끌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심리도 숨어 있다.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자기보호 행위이기도 하다. ‘내가 다 해봤다.’, ‘누구와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나는 돈보다 성취가 목적이다.’ 한마디로 허풍 떠는 말이다. 영웅담도 같은 맥락. 이런 회장은 아첨과 맞장구를 좋아한다. 허세에 근거를 꿰맞춰주면 특급 참모가 된다. 스스로 절제하면 애교 수준으로 봐줄 수 있는 노란 거짓말이다.

 

4. 위선형 거짓말 

속일 의도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직원에게 손해를 입힌다. ‘사람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회사보다는 가정이 우선이다.’, ‘고객의 이익이 회사의 이익이다.’ 회장 자신은 직원과 고객을 위해 일한다고 착각한다. 스스로 진짜라고 믿는다. 약간의 창작능력도 필요하다. 되풀이하다 보면 언행불일치와 일구이언의 문제를 낳고, 직원들의 실망과 불신으로 이어져 가식적인 회장으로 자리 잡는다. 시커먼 거짓말이다.

 

5. 범죄형 거짓말  

자신은 이익이지만 직원과 사회에 피해를 준다. 작게는 약속을 어기는 것에서부터 분식회계 등 진실을 조작하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작심하고 하는 거짓말이다. 계획된 거짓말이라는 점에서 앞엣것들과 다르다. 이런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자기증식 과정을 거치면서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결국 사회적 비난은 물론, 처벌 대상이 된다. 일명 새빨간 거짓말이다.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어지지 않는 한 회장님의 거짓말은 쭉 계속된다.

 

 

남자이자 여자인 회장과 동거하는 법

알고 보면 회장도 한 인간일 뿐

      

본시 여성인데 남성성이 강해져 중성화된 사람은?”

 

아줌마!”

 

싱겁다. 임직원과의 대화 자리에서 한 회장의 첫 질문이다.

 

본시 남성인데 여성성이 강해져 중성화된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답은 회장이란다.

 

회장의 중성론?

 

개인과 법인의 차이에서 시작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든다. 법인은 사람이 만든다. 둘은 엄연히 다르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감정이 있다. 사람이니까. 하지만 법인에는 사람의 감정을 개입시켜선 안 된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운영하지만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회장은 왜 중성이어야 하는가? 회장은 법인을 책임지고 있고, 법인은 사람이 아니어서 그렇다. 사람이 아닌 법인을 사람의 감정으로 운영해선 안 된다. 따라서 회장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아니 남성이면서 여성이어야 한다.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고루 충만해야 한다. 초식남인 동시에 육식녀여야 하는 것이 회장의 자리다.

 

회장은 여성성을 갖는다. 수시로 의심한다. 시험하려고 한다. 세심 꼼꼼하다. 애정에 목마르다. 내 편이 되어주길 바란다. 회장은 남성성도 강하다. 세게 보이고 싶어 한다. 성과가 중요하다. 결론부터 말한다. 도대체 해결책이 뭐냐고 묻는다. 이유 없이 화를 낸다

 

아수라 백작처럼 전혀 다른 사람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회장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양반 미친 것 아냐? 이 사람에게 맞추는 건 미친 짓이야!’ 마치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가 같이 사는 결혼은 미친 짓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회장은 그래서 회장이다. 거문고와 비파가 어우러져야 금슬이 깨지지 않는 법. 남성성과 여성성을 함께 구비하지 못한 회장은 일찍이 사라졌다. 현재 남아 있는 회장은 모두 아수라 백작들이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약간의 수고만 감수하면 된다.

 

1. 인정하는 게 시작이다. 회장 안에는 고양이도 살고 개도 산다. 개는 기분 나쁠 때 으르렁 댄다. 고양이는 그 반대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때는 웃고, 어떤 때는 짜증내는 게 회장이다. 뿐만 아니라 또 어떤 때는 짬뽕도 된다. 햇볕은 쨍쨍한데 비가 오는 호랑이 장가가는 날처럼. 회장은 그런 인종이다.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같이 살 수 있다.

 

2. 관심 갖고 봐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XX 성염색체가 더 왕성하게 활동하는지, 어느 때에 XY 성염색체가 발동되는지 관찰해야 한다. 정성들여 보면 보인다. 변덕에도 나름 일관성은 있다. 유심히 보면 얼마든지 예측 가능하다. 상황 파악이 된다.

 

3. 그때그때 맞춰 살아야 한다. 별 수 없다. 화성에 가면 화성인으로, 금성에 갈 때에는 금성인 문법으로 살아야 한다. 결과가 중요한 때는 결과를 챙기고, 공감이 필요한 때는 정서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자괴감 느낄 필요 없다. 하루는 화성인, 또 다른 하루는 금성인으로 커밍아웃하며 사는 게 직장인이니까.

 

4. 결국 한 인간에 충실하면 된다. 남성과 여성을 떠나 회장도 인간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갖고 산다. 주눅들 것 없이, 눈치 볼 필요 없이 어여삐 여기자. 시시때때로 조증과 울증을 넘나드는 회장, 소심과 대범이 맥락 없이 교차하는 회장을 측은지심으로 대하자. 그도 평범하고 외로운 한 사람이다.

 

수필가 E.B 화이트는 “인류나 인간에 대해 쓰지 말고 한 사람에 대해 써라.”고 했다. 회장이 어떤 인종인지, 일반론은 의미 없다. 당신의 회장, 그 한 사람이 중요하다.

 

naver daum
SNS 로그인
naver
facebook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