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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에 담긴 인생

  • 2020.01.31(금) 10:16

[페북사람들] 방보영 프리랜서 다큐감독

서울역서 서대문 방향으로 가다보면

염천교 주변 수제화 거리가 나온다.

이곳은 경성역 완공 후인 1925년경

임시로 화물을 보관하던 창고서 나온

피혁을 원료로 하는 잡화나 구두점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해방 후에는 군화를 재료로

신사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수제화 거리로 알려졌다고 한다.

1960~70년대 산업화 당시

대량 생산방식을 도입하면서

성수동이나 금호동 일대가

재화산업 집적지로 떠올랐지만

이 와중에도 이 수제화 거리는

꿋꿋이 명맥을 유지해왔다

안병인 사장님도 이 거리에서

30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기 온 지는 30년째지만

평생 구두와 함께 살았어.

올해 내가 일흔 살인데

아버지가 예전에 나이 수만큼

세월이 흘러간다고 하셨거든.

70킬로로 하루하루 지나가는데

여기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요즘은 그런 생각을 많이 해."

"여기로 오게 된 계기가 있는데

원래 아현동서 장사를 했었는데

건물주가 건물을 새로 짓는다고

몇 개월만 나가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놀면 뭐하나 싶어서

지인의 소개로 여기서 일을 했지.

그런데 아현동 건물 완공이

계속  미뤄지면서 3년이 흘렀어.

이곳 사람들과 정도 많이 들었고

마침 가게 자리도 나오고 해서

여기에서 터를 잡게 된 거지.

당시만 해도 다리 주변은 물론

길 건너까지 전부 구두점이었어.

그만큼 번성했지."

"한국전쟁 직후엔

대부분 다른 업종 가게였어.

그런데 빈 가게에 하나둘씩

우리 같은 사람들이 들어와

헌신발이나 워커 등을 사서

고친 후에 중고로 팔았거든.

그러다가 우리가 언제까지

헌신발만 팔 순 없잖아라는

분위기가 조금씩 만들어졌고

그게 수제화 거리의 시작이었지."

"난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왔어.

당시 돈 500원을 쥐고 있었어.

사실 내 꿈은 자동차 정비사였어.

그런데 숙식제공이 안되더라고.

마침 숙식제공 구두가게가 있었고

조수로 들어가서 일을 배웠지.

먼지 털고 광 내는 일부터 시작했어.

그 단계를 거쳐 처음 만든 신발은

특별하지 않은 무형태 구두였어.

당시 기술자는 일본 사람들이었는데

절대로 기술을 안 가르쳐주는 거야.

몰래 곁눈질로 보다가

틈이 나면 만들어보곤 했는데

그게 무형태 구두였어."

"당시 일본 기술자들은

구두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으려고

구두 제작을 4단계로 나눠놨어.

디자인과 갑피, 바닥 마무리

그리고 광내는 단계까지

우리나라에서 이 모든 과정을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돼.

단계별로 모두 배워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없었던 거지."

"서울로 올라올 땐 포부가 컸어.

기술을 배워서 돈 많이 벌어

가족들에게 보내주려고 했지.

농사짓는 연로한 부모님이

어린 나이에도 마음 아팠거든.

배움은 짧고 평생기술을 찾다 보니

구두 일을 시작하게 된 거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지만

구두와 평생을 함께 걸어온 거지."

"염천교 길 건너편에도

수제화 가게가 일부 늘어서 있지만

지금은 재개발로 거의 사라졌어.

몇몇 가게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

몇 십 년 전만해도 구두가게 수십 곳이

통금시간까지 작업하던 때도 있었는데

이젠 옛 추억이 되었어."

현덕제화도 그 명맥을

잇고 있는 가게 가운데 하나다.

서택섭 사장님은 수제화 기술자인

남편과 함께 그 시간을 지켜왔다.

"저희는 구두공장을 했는데

중국제품이 밀려들어오면서

지금은 많이 어려워졌어요.

아무래도 가격 차이가 커요.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도 없어요.

기술자 나이가 보통 60. 70대죠.

안된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2~3년 전부턴 정말 힘들어요.

1980~90년대 당시만 해도

물건이 없어 못 팔았는데

사람이 나이를 먹는 만큼

세상도 그만큼 변한 것 같아요."

광택으로 윤기나는 구두들이

주인을 찾기 위해 줄지어 있다.

어릴 적 가장 큰 용돈벌이는

아버지의 구두 닦이였다.

출근하기 전 윤기가 나도록

호호 작은 입김을 불어가면서

열심히 닦지만 결과는 별로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흔쾌히

동전 몇 개를 꺼내주곤 하셨다.

그 시절을 지나 진학할 때쯤이면

동네 수제화 가게에 데리고 가

발에 딱 맞는 구두도 사주셨다.

수제화 거리의 퇴장과 함께

이 추억들도 어느덧 사라져간다.

안병인 사장님 손가락에는

빛나는 훈장이 박혀있다.

평생동안 구두를 만들면서

두껍게 새겨진 굳은살이다.

첨엔 밖으로 벗겨지다가

안으로 박혔다고 하신다.

바로 그 거친 손으로

가족들을 지켜내셨다.

그리고 그 손으로 만든

구두를 신는 그 누군가도

열심히 오늘의 삶을 살면서

누군가를 위해 달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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