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중규직'을 만들겠다는 기획재정부의 구상은 노동계는 물론 고용노동부의 반발에 부딪혔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국정과제로 제시해 사실상 기재부의 손을 들어줬다.
돌이켜보면 IMF 당시 정리해고 도입 이후 노동시장 양극화 현상은 심화됐다. 이런 까닭에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주요한 목표로 삼고 ‘유연안정성(Flexicurity)’을 화두로 삼았다. 하지만 경직된 쪽의 유연성(Flexibility)도 제고하지 못했고 비정규직과 불안정 노동층의 안정성(Security)도 확보하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역시 대선 공약이나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선 유연성과 안정성을 함께 내세웠지만, 최근엔 확연히 유연성 제고 쪽으로 기울었다. '중규직'이란 용어로 대변되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최근 논의 전개와 과거 정부의 여러 시도, 해외 사례, 정치사회적 역학관계와 실현 가능성 등을 3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 지난 4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전국민 비정규직화하는 박근혜 정부 종합대책 저지 공공운수노조 긴급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경직된 고용체계를 바꾸려는 시도는 지속적이었다. 2003년 6월 발표된 〈참여정부 100일 성과와 비전〉의 노동분야에는 '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임금·근로시간 등 개별기업 차원의 고용유연성을 제고 - 다만 기업고용의 유연성 확대를 위해서는 노동시장 전체의 안정성이 확보될 필요'라고 명기되어 있다.
◇ 2007년부터 나온 '중규직'이라는 용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6개월이 지나자 "협력업체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두 배, 세 배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뭉쳐서 노동운동을 앞장서 밀고나가고 있지만 노동자간 격차가 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말로만 격차해소 하자고 한다"고 대기업 노조를 강하게 비판한다. 이후 참여정부는 비정규법을 추진했다.
경직된 고용구조를 갖춘 대기업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는 대신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기업 노조는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맹렬히 반대해 노정갈등만 심화됐다. 지리한 갈등 끝에 2006년 11월 30일 비정규 3법이 통과된다.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노동위원회법 등이다.
그런데 비정규법이 유연성 확보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안정성 제고는 실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참여정부의 민정수석, 비서실장을 지낸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의원이 홈에버 비정규직 사태를 다룬 영화 '카트'(사진)를 본 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이랜드 파업은 참여정부 사람들에게는 아주 큰 상처다. 그 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보호와 정규직 전환의 촉진을 위해서 비정규직 보호법 만들었는데, 막상 법 시행됐을 때는 사용자들이 외주용역이니 사내하청으로 법망을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실은 '중규직'이라는 단어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정규직과 다른 별도의 근로계약을 맺되 고용을 보장하는 무기계약직 등을 2007년부터 '중규직'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그 당시의 중규직은 처우는 낮지만 정년은 보장되는 쪽이었다면 지금의 중규직은 처우는 높이되 고용 기간은 제한을 두자는 쪽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우 대통령부터 노동유연성 강화를 수 년간 강조했고 노동부의 명칭을 고용노동부로 바꿨을 정도다. 하지만 노동시장 구조에 대해선 오히려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는 중평이다.
◇ 독일 모델 벤치마킹..아젠다 2010은 무엇인가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노동 유연성 제고를 강조하며 독일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았다. 박 대통령은 "독일 등 선진국이 노동개혁을 통해 재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듯이 우리나라도 노사 간 긴밀한 토론과 협의를 통해서 바람직한 방안을 만들어야 하겠다"면서 "독일의 경우 노동개혁의 결과는 200만명의 추가 고용, 고용률도 60% 중반에서 7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고 강조했다.
흥미로운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도 독일의 노동 구조 개혁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었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5년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슈뢰더 당시 독일 총리의 '아젠다 2010'을 배워야 할 과감한 개혁승부수로 꼽았다. 노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이다.
'아젠다 2010'은 무엇이었을까? 사민당 출신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2003년 3월 내놓은 방대한 개혁책을 일컫는다. 경제, 교육, 세금, 노동시장, 의료보험, 연금 등의 분야를 모두 포괄했다.
우파 야당인 기민·기사 연합이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하르츠' 노동개혁안(폴크스바겐사의 피터 하르츠 인사담당 이사가 관련 위원회의 수장을 맡아 내놓은 노동개혁 보고서를 지칭)으로 이어졌다. 개혁안에 따라 2004년 7월에 ▲실업수당 지급 기간을 대폭 축소▲사회보장금과 실업수당을 통합 ▲직업소개소가 실업자에게 제시하는 일자리 거부 금지 등이 채택됐다.
▲ 하르츠 개혁의 주요 내용 (출처 = 한국경제연구원, '독일 근로연계 복지제도의 특징과 시사점' 연구보고서. 2014년 2월) |
유연성 제고 방안과 더불어 고용 촉진 방안도 채택됐다. 1인 기업 창업시 3년간 지원금 제공(1년차: 600유로, 2년차 330유로, 3년차 200유로), 월급여 400유로 이하 작은 일자리 창출시 소득세 감면 등이 유인책으로 제시됐다. 기업의 사회보장분당금도 낮춰주고 법인세도 인하했다.
대기업 노조들도 발을 맞췄다. 금속노조(IG 메탈)와 지멘스는 생산시설을 국외로 옮기지 않는 대신 임금 동결과 주당 노동시간 연장에 합의했고 다임러-크라이슬러, 오펠, 폴크스바겐 같은 대표적 기업들은 일자리 보장과 노동시간 연장이 포함된 임금동결을 맞바꾸는 대열에 합류했다. 슈뢰더 정부는 이를 통해 1년 간 11만개의 1인 기업과 170만개의 작은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아젠다 2010은 일약 '생산적 복지'의 전범으로 떠올라 각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하지만 박한 평가도 존재한다. 새로 생긴 작은 일자리라는 것이 당시 환율로 한화 50만 원 정도에 불과한 질 낮은 일자리라는 것이고, 이같은 개혁안이 독일의 전통적 사회적 경제시스템에 손상을 입혔다는 것이다 .
성공의 역설도 있었다. 아젠다 2010을 통해 전통의 사민당은 분열했고 2005년 연방 총선에서 우파 기민·기사연합에 패배했다. 앙겔라 메르켈은 그 때부터 장기집권을 하고 있다.
[중규직이 뭐길래] 기획 시리즈는 외부 전문가와의 협업(co-work)을 지향한다는 편집방향에 맞춰 외부 기고를 통해 작성됐습니다. 본 기사는 '의제와 전략그룹 더모아'의 윤태곤 이사(taegonyoun@gmail.com)가 취재 및 작성을 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