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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집살이 in 유럽]⑦취준생도 안정감…"주거는 권리"

  • 2019.08.07(수) 09:00

<암스테르담 사회주택 거주자 알렉산더 채플린 인터뷰>
"소득없지만 정부 보조금에 사회주택 입주까지…권리 누려"
14년 기다려 사회주택 입주…집 구하기 경쟁은 치열해져

[암스테르담=노명현 기자, 원정희 기자, 배민주 기자] "안정적인 주거 환경은 내가 가진 하나의 권리다."

지난 6월12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알렉산더 채플린(Alexander Chaplin, 30대 중반)은 최근 사회주택에 입주했다. 14년을 기다려 입주 기회가 왔다는 그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날도 새 집을 꾸미는데 여념이 없었다.

처음엔 아직 집이 완전하지 않다며 공개를 꺼려했지만 그의 표정엔 새 주거공간에 대한 설렘과 동시에 안정감이 엿보였다. 사회주택에 대한 그의 생각도 명확했다. 특히 사회주택이라는 안정적인 거주 공간을 확보한데 대해 "혜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권리"라는 대답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뇌리를 가장 날카롭게 스쳤다.

불현듯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영화 부당거래 중)는 대사로 우리 사회를 적나라하게 비판했던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호의'라는 단어를 통해 갑과 을을 나누는 우리 사회와 달리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호의'나 '수혜'가 아닌 당연한 권리인 것이다.

알렉산더 채플린은 14년을 기다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사회주택에 입주할 수 있었다. (사진: 배민주 기자)

◇ '권리' 누리는 사회주택 입주자

알렉산더 채플린이 살고 있는 사회주택은 암스테르담 중심가에서 차로 15~20분 가량 떨어진 곳이다. 동네는 한적했고 어느 주택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물은 오래돼 보였지만 깨끗했다.

그가 이곳으로 이사 온지 석달 정도 지났다. 14년의 기다림 끝에 사회주택 입주 기회를 얻었다는 그의 대답에서는 그만큼 큰 만족감도 느낄 수 있었다.

채플린은 "집이 필요했던 상황이었고 이 집이 아니라면 앞으로 입주 기회를 얻기 힘들 수 있다는 생각에 입주를 결정했다"며 "이 집도 13번째 후보자였는데 운이 좋게도 12명(앞 순서 대기자)이 모두 입주를 포기하면서 나에게 기회가 왔다"고 말했다.

사회주택은 집의 위치, 크기 등을 보고 입주 대기자들이 입주여부를 선택하는데, 마음에 드는 집이 나올때까지 입주 기회를 미룰 수 있다. 다만 최근들어 사회주택 입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지금 기회가 온 집을 선택할지, 다음으로 미룰지에 대한 입주 대기자들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다행히 혼자 사는 그로서는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가 살고 있는 사회주택은 건립된 지 100년이 다 된 건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20~30년 정도 돼 보였지만 실제로는 연륜이 상당했다. 내부는 물론이고 건물 전체적으로 틀은 유지한 채 리노베이션(기존 건축물을 헐지 않고 개‧보수해 사용)을 한 덕분인 듯 하다.

알렉산더 채플린이 거주하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사회주택 단지 모습(사진: 배민주 기자)

사회주택협회들은 공급한 주택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리노베이션 투자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알렉산더 채플린은 "이 집은 6년 전에 유리창과 건물 환기·난방시스템 등 건물 전반에 대한 개‧보수가 이뤄져 살기에 부족함이 없다"며 "암스테르담에서는 많은 사회주택이 리노베이션했거나 예정돼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의 집은 방 2개와 거실, 주방과 화장실은 물론 작은 발코니 공간을 갖추고 있다. 혼자살기에 충분해 보였다. 신혼부부도 살 수 있을 만한 집이었다.

가격 부담도 크지 않다. 특히 채플린은 최근 수입이 끊긴 상태다.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그는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학교에서 월급을 받았지만 최근 그 과정이 마무리되면서 현재는 수입이 없다.

채플린은 "새 직장을 구해야 하지만 취업을 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은 상황"이라며 "그럼에도 집이 있다는 점에 안정감을 느끼고, 또 지금처럼 소득이 없거나 적을 때는 정부가 보조금을 주기 때문에 임대료에 대한 부담도 크지 않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저소득층의 임대료 부담을 줄이기 위해 주거급여 형태로 임대료를 지원하고 있다. 사회주택 거주자도 해당된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고시원을 전전하는 등 열악한 거주환경에 살고 또 고시원비나 원룸의 월세를 내기 위해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우리나라 취준생들은 채플린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 "집 뜯어먹고 살 거 아니잖아요"

채플린은 결혼을 해서 아기가 생기거나 새로 구한 직장이 다른 지역에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가능한 이 집에서 오래 살고 싶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들었다. 사회주택도 결국 임대인데 내 소유의 집을 갖고 싶은 욕심은 없는 지, 그래야 더 안정적인 삶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지극히 우리나라의 상황을 반영한 궁금증이었다.

이에 대해 채플린은 집을 직접 사는 것보다 가능하면 임대하는 게 훨씬 낫다고 답했다.

사진: 배민주 기자

그는 "네덜란드도 시골(지방)에서는 대부분 집을 소유하고 있지만 암스테르담 같은 대도시는 사회주택을 비롯한 임대 비중이 더 크다"며 "집을 빌려서 살아도 원하는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살 수 있고, 세입자가 스스로 집을 꾸미는 등 많은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임대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집을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집을 갖고 있으면 세금도 많이 내고 향후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야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때는 집이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며 "집을 빌려서 사는 게 계약 관계에서도 자유롭고 집에 대한 고민도 덜어준다"고 강조했다.

물론 암스테르담 시민들의 주거 여건도 완벽하지는 않다. 너무 비싼 민간 임대주택 임대료와 사회주택 부족 현상으로 인해 그들이 권리로 여기는 안정적인 주거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채플린은 "누군가 집을 이용해 많은 이익을 창출하면 집이 필요한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며 "사회주택에 입주하기에는 소득이 많지만 민간 임대주택의 높은 임대료를 부담하기에는 버거운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뉴욕이나 파리 등 대도시에서는 소득의 절반 이상을 집값으로 쓰는 게 당연할지 몰라도 암스테르담은 그렇지 않다"며 "주거를 하나의 권리로 여기고 있다는 점은 정부가 주택시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여건이 조성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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