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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보영의 페북사람들]경제 몽상가의 꿈

  • 2020.09.11(금) 11:27

미국명 홍스티븐성호

미국 시민권자인데 제주가 좋아

2017년부터 계속 머물고 있다.

홍성호 씨는 경제분석가다.

특히 현장을 중요시한다.

미국 교포 언론사에

경제 분석기사를 싣고 있고

제주 대정읍 사회복지회관에서

'경제는 인문학이다'이란 주제로

일주일에 한 번씩 강의도 한다.

홍 씨는 한마디로 정의한다.

"푹 자고 제대로 먹고

또 편하게 입고 잘 노는 게

바로 경제입니다."

홍 씨가 제주에 정착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뭘까.

"미국에서 일상은

책방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클린 드 프레(Jacqueline du Pre),

예후디 메뉴힌(Yehudi Menuhin),

리히터(Sviatoslav Richter) 등의

잔잔한 연주를 들으면서

커피를 마시고 책 구경을 하다

취미처럼 또 습관처럼

문득 멍하니 넋을 놓고

내 내면을 뒤집어 보곤 했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경제 애널리스트의 일상이

바뀔 것이란 생각이 들었죠.

마침 뉴욕타임스 기사를 봤는데

딱 내 얘기란 느낌이 왔어요."

"아마도 2030년쯤이면 로봇이

월스트리트를 장악할 겁니다.

조만간 현실이 될 터인데

제가 예전에 그리고 바라던

경제학자 모습은 결코 아니죠.

정밀한 통계와 수리적 모델로

가치를 재단하는 일은 점차

로봇에게 넘겨야 할 겁니다.

미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이걸 재미있게 만드는 일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제주는 연로한 아버지와

마지막 여생을 보내기 위해

정착하기로 마음먹었죠.

원래 다시 돌아갈 작정이었는데

제주의 풍광이 그 어떤 곳보다

아름답고 귀하다는 생각이 들어

제주의 삶 그리고 경제 방식과

더 친해지자고 마음먹었어요."

"예술경제학을 염두에 뒀어요.

그러려면 문화인류학과 음악

고고미술사, 건축, 공연예술단체

그리고 IT전문가들에 이르기까지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거든요.

제주는 국제자유도시로

다양한 문화와 예술이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갖고 있죠.

영어교육도시로도 제격이어서

제주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일자리도 많을 것으로 판단했죠.

엄마들에게 생활영어를 가르치고

또 모슬포 초등학생들에게

재능 기부로 영어를 가르치다가

최근엔 은퇴한 어른들을 대상으로

매주 한 번 경제 강의를 하고 있죠.

미국 교포 언론사에 경제 관련

분석 기사도 싣고 있어요.

그 와중에 틈이 나면

검은 돌과 거친 바람

그리고 푸른 바다에 실린

제주의 내음을 찾아봅니다."

"최근 코로나19의 재유행으로

많은 분들이 어려우실 텐데

제주는 더 조건이 좋지 않아요.

특히 배송비가 비싸다 보니

배달 문화가 뒤처져 있어요.

관광객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주민들은 같은 물건이라도

가격이 두 배 가까이 됩니다.

그러니 소비량도 절반에 불과하죠.

제주도 차원에서 직접

운송사업을 운영하면서

비용을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제 전공에 비추어

코로나19에 따른 변화들을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재택근무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번잡한 도시지역

주택 가격을 낮출 수 있죠.

투자 패턴도 달라져야 해요.

로봇과 온라인, 4차 산업에

더 역량을 집중해야 합니다.

데이터센터를 충분히 건설하고

사이버 거래소도 만들 수 있죠.

이를테면 스타트업 기업들의

정보와 기술 현황을 토대로

기업의 가치를 거래하는 거죠."

"코로나19 사태는 분명

큰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

하지만 공포나 파멸로 이어지는

재앙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creative failure)'는

이 시대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술과 문화 측면에서도

실패와 좌절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탄생 과정을 보여줘요.

제주의 모습이라 할 수 있죠.

세상은 계속 바뀌는데

변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매몰되고 지배당합니다.

그래서 알프레드 마샬이 말한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바로 지금 필요한 겁니다.

사람에겐 따뜻한 마음으로

정책은 차가운 이성으로

판단하는 게 경제학자의 태도죠."

홍 씨는 아직도 또렷한

여행의 기억이 있다고 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가장 어렵고 뜻깊은 시기였죠.

당시 서브프라임 모기지회사서

직접 모기지 담보채권(MBS)을

설계하는 작업에 참여했어요.

그 현장에서 금융위기가 터졌죠.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현실이 됐죠.

주택 가격은 절반 이상 떨어졌고

은행들은 문을 닫게 됩니다.

당시 은행들이 가진 1달러짜리

주택 채권이 5센트에 팔렸어요.

새로 부자가 될 기회가 온 거죠.

대개 큰 불황이 닥치면

그만큼 돈 벌 기회가 생겨요.

디킨스가 말한 최악 상황이자

최고의 시절이 되는 것이지요."

"당시 직장 인터뷰를 위해

LA에서 워싱턴DC까지

장거리 로드 드라이브를 했죠.

4박 5일간 3600km를 달렸죠.

혼자서 대륙 횡단을 한 셈인데

돌아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요.

잘나가던 신용위험 분석가였는데

위험이 닥쳐오는 걸 알면서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런 상황을 겪고 난 후에

다시 회복의 확신을 갖게 되자

결국 부동산도 금융이란 본질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저 도로를 달렸을 뿐인데

미국의 속살을 거의 그대로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었죠.

오래된 명성 속에 쇠퇴하는

미국의 영광(pax america)은

사람들의 표정과 언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자신의 동네가 최고인 줄 아는

차별과 폐쇄의 광경을 보았고

세계 최강대국에 걸맞지 않은

빈약하고 열악한 인프라에

새삼 놀라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론 사시사철

따뜻한 캘리포니아보다

사계절이 뚜렷한 워싱턴DC가

더 살기 좋게 느껴진 건

아마도 한국과 비슷한

위도에 있어서 그런 듯해요.

일년 내내 변화가 없는

캘리포니아의 날씨는

처음엔 좋을 수 있지만

마치 밋밋하고 지루한 인생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미국 대륙 동서의 두 도시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암울한

두 단면을 모두 보여줬어요."

"경제는 머리로 배우는 게 아니라

삶의 막다른 골목 같은 막힘에서

빠져나오는 그 과정에서

절실하게 체득하게 됩니다.

예전엔 살아본 적 없는 고향

제주에 정착해 자연은 물론

한라산 신화를 둘러싼

무형 자산의 가치를

집중 탐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앞으로도 쭉

더 잘 먹고 잘 자고

그리고 잘 놀 수 있는

무형의 문화적 가치를

경제적으로 수량화하는

작업에 미쳐서 살 것 같아요."

잇달아 거센 태풍이 지나고

서울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홍 씨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퇴행의 과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미래를 위한 길을 열었고

어렵고 암울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창조적 시기라고 말한다.

바로 그 말 그대로

오늘을 잘 견디다 보면

새로운 희망을 그릴 수 있는

무지개 같은 내일이 오지 않을까

진심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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