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유통]은 한주간 유통·식음료 업계에서 있었던 주요 이슈들을 쉽고 재미있게 정리해 드리는 콘텐츠입니다. 뉴스 뒤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사건들과 미처 기사로 풀어내지 못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편집자]
두 마리 토끼
국내 맥주 시장은 참 이상한 시장입니다. 완고한 것 같으면서도 유연하고, 새로운 것을 원하는 듯하면서도 기존 것만 찾는 시장이 바로 한국 맥주 시장입니다. 수많은 수입맥주가 '트렌드'를 외쳐도 판매 1위는 언제나 '카스'입니다. 그런데 또 하이트진로의 '켈리' 같은 제품은 나오자마자 3위 자리를 꿰찹니다. 대기업의 힘일까요? 이병헌에 수지까지 기용한 오비맥주의 '한맥'이 명함도 못 내미는 걸 보면 또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알 수 없는 시장의 한 가운데에서 헤매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롯데칠성입니다. 롯데칠성은 지난 2014년 '클라우드'를 출시하며 국내 맥주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당시 클라우드가 내세운 '물을 섞지 않은 올몰트' 마케팅은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의 양강구도를 위협할 만한 카드였습니다.
다른 국산 맥주보다 진한 맛을 앞세운 클라우드는 2030 젊은 층으로부터 꽤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소주를 섞어 마시지 않아도 맥주 자체로 맛있다는 평이 많았죠. '처음처럼'으로 소주 2위 자리를 굳힌 롯데칠성이 맥주 시장에서도 '한 몫'을 차지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 롯데칠성은 회심의 수를 둡니다. 2017년 유흥 시장 공략을 위한 신제품 맥주 '피츠 수퍼클리어'를 내놓은 거죠. 피츠는 '올몰트' 맥주였던 클라우드와 달리 전분을 섞어 향을 줄이고 탄산의 목넘김을 강조한 소위 '소맥용' 맥주였습니다. 당시엔 가정용 시장에서 반응이 좋았던 클라우드와 유흥 시장을 노린 피츠로 '쌍끌이'에 나서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문제는 피츠에 마케팅을 집중하다 보니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클라우드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피츠 출시 전 꾸준히 상승세이던 클라우드는 2017년을 기점으로 성장이 멈췄습니다. 1000억원을 바라봤던 매출도 절반 수준으로 꺾였죠.
그렇다면 그 자리를 피츠가 잠식하는 '카니발라이제이션(잠식효과)'이 벌어졌을까요. 이 이야기의 결론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겁니다. 피츠는 부진을 면치 못하다가 출시 5년 만인 2022년 단종 수순을 밟습니다. 클라우드도 이젠 쉽게 찾아보기 힘든 맥주가 됐습니다. 신제품을 살리려다가 잘 나가던 클라우드까지 브레이크가 걸린 셈입니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 두 번 실수는?
몇 년 전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 이유가 있습니다. 롯데칠성이 또 한 번 비슷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돼서입니다. 롯데칠성은 최근 신제품 맥주 '크러시'를 키우기 위해 기존 클라우드 생 드래프트를 단종시킬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클라우드 생 드래프트는 지난 2020년 클라우드의 후속작으로 등장한 맥주입니다. 피츠의 실패로 부진에 빠진 롯데칠성 주류 부문을 반등시킨 주인공입니다. 사실상 기존 클라우드 오리지널을 완전히 대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비자 평도 호평 일색이었습니다.
가정용 시장에서 나름 자리를 잡은 클라우드 생 드래프트를 단종시키는 건 지난해 말 출시된 신제품 맥주 크러시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크러시는 원래 유흥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나온 제품입니다. 피츠의 포지션을 그대로 계승했죠. 맛도 유흥 시장에 포커싱 돼있어 진한 맥아의 맛보다는 청량함과 목넘김을 강조했습니다.
빙산을 시각화한 병 디자인만 봐도 크러시의 방향성을 짐작할 수 있죠. 이때까지만 해도 클라우드 생 드래프트의 자리는 굳건했습니다. 불과 반 년 전인 지난해 7월 클라우드 생 드래프트의 패키지 리뉴얼을 진행했다는 것만 봐도 단종 계획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흥 시장에서 크러시의 입점률이 예상을 밑돌면서 롯데칠성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주점과 식당 등 유흥시장의 주류 냉장고는 전쟁터입니다. 한정된 공간에 새 제품을 넣으려면 기존 제품이 자리를 비워줘야 합니다. 이미 클라우드의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롯데칠성에게 크러시의 자리가 쉽게 생길 리 없었을 겁니다. 업계에선 크러시의 유흥 시장 입점률을 20% 안팎으로 봅니다. 5곳 중 1곳에만 크러시를 판매한다는 겁니다.
만만한 게 '홈술'
롯데칠성의 선택은 결국 '가정 시장 공략'이었습니다. 출시 당시 세웠던, 가정 시장은 클라우드 생 드래프트, 유흥 시장은 크러시로 나눠 공략하겠다던 전략을 3개월여 만에 폐기한 겁니다. 가정 시장은 편의점과 대형마트가 중심입니다. 신제품 하나 넣는 게 유흥 시장만큼 어렵지 않죠.
롯데칠성은 곧 크러시의 가정 시장용 제품 출시를 대대적으로 알리고 마케팅에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클라우드 생 드래프트의 단종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래도 두 제품의 카니발라이제이션을 고민한 결과일 겁니다.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제품을 단종시켜야 할 때도,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품을 없애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번 단종 선택이 크러시의 '대박'으로 이어진다면 클라우드 생 드래프트를 포기한 게 그리 아깝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닌, 크러시의 시장 상황에 맞춰가다 보니 결정된 것이라면 미래를 낙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잡아 둔 '클라우드생 마니아'까지 잃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롯데칠성의 이번 도박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올 여름 맥주 성수기 시즌이 기다려지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