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인사
LG생활건강이 LG그룹 정기 임원인사가 진행되기도 전에 CEO 교체 카드를 꺼내들었다. 게다가 차석용 전 부회장 퇴진 이후 3년만에 다시 외부 인사를 영입했다. 이번 조기 인사에 대해 LG생활건강이 느끼는 위기감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는 해석이 나온다.
LG생활건강은 29일 이사회를 열고 글로벌 화장품 기업 로레알 출신의 이선주 사장을 신임 CEO로 선임했다. 이선주 사장은 글로벌 및 국내 화장품 업계에서 30년간 몸담으며 다양한 브랜드를 키워낸 마케팅 전문가다. 이 사장은 오는 10월 1일부로 업무를 시작한다. 11월 10일 열릴 예정인 임시주주총회와 이사회를 통해 대표이사로 선임될 예정이다.
현 CEO인 이정애 사장은 3년만에 자진 사임했다. LG생활건강은 "이 사장은 LG생활건강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새 CEO를 중심으로 내년 이후를 준비할 수 있도록 정기인사 이전에 용퇴를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이 사장은 2022년 11월 18년간 LG생활건강을 이끌었던 차석용 전 부회장의 후임으로 이 회사 CEO가 됐다. 당시 LG그룹 최초의 여성 대표이사로 화제를 모았다. 그는 '차석용 매직'의 그늘에서 벗어나 LG생활건강의 실적 반등을 이끌어야 하는 중책을 맡았다. 하지만 중국 시장 부진과 내수 둔화 속에서 실적 회복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번 인사가 이례적인 것은 '시기' 때문이다. 통상 LG그룹은 11월 말 정기 임원인사를 단행한다. 하지만 LG생활건강은 이보다 두 달이나 빨리 CEO 교체에 나섰다. 그만큼 LG생활건강이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인 셈이다.
중국 의존도 낮춰라
LG생활건강은 2021년 연매출 8조원을 넘기며 사상 최대 실적을 썼다. 그해 영업이익은 1조2890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 정부가 '제로 코로나' 정책을 앞세워 시장을 봉쇄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LG생활건강의 매출액 대부분은 화장품 특히 '더후'에서 나오는데 더후의 최대 시장이 중국이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LG생활건강은 좀처럼 실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차석용 전 부회장이 용퇴하며 새롭게 선임된 이정애 사장 역시 3년 내내 고전했다. 지난해 LG생활건강의 매출액은 6조8119억원, 영업이익은 4590억원까지 줄었다. 게다가 올 상반기에는 매출액이 3조3027억원을 기록하며 전년보다 5.3% 줄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전년 보다 36.3% 줄어든 1972억원에 그쳤다. 최근 해외에서 K뷰티가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특히 아쉬운 수치다.
관련업계에서는 LG생활건강의 지나친 중국 의존도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은 K뷰티 최대 시장이지만 한한령 등 변수가 많아 여러 기업들이 고전하고 있다. 이에 LG생활건강 역시 중국 시장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북미에서 다양한 인수합병(M&A)을 단행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성장세는 LG생활건강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존 등에서 K뷰티가 높은 인기를 끌고 있지만 LG생활건강 주요 화장품 브랜드들은 미국 현지에서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어서다. 실제로 LG생활건강의 지난해 북미 매출은 5662억원으로 전년 대비 11.8%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LG생활건강이 이 사장을 선임한 것은 그가 화장품 마케팅, 특히 미국 시장 전문가이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 사장은 로레알에서 근무할 당시 한국 키엘 총괄을 맡아 한국을 미국에 이어 글로벌 매출 2위 국가로 성장시켰다. 이어 키엘을 로레알 럭셔리 전체 2위 브랜드까지 도약시키면서 '화장품업계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같은 경력을 바탕으로 2018년 11월에는 엘앤피코스메틱의 글로벌전략본부 사장으로 선임됐다. 이 사장은 그해 설립된 엘앤피코스메틱의 미국법인(L&P Cosmetics NYC, Inc.)의 법인장을 맡아 마스크팩 브랜드 '메디힐'의 미국 시장 진출을 지휘했다. 이어 2021년에는 세계적인 생활용품 기업 유니레버의 뷰티&웰빙 한국 총괄로 부임해 카버코리아의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카버코리아는 유니레버가 2017년 인수한 기업으로 스킨케어 브랜드 'AHC'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 전문가 통할까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사장이 LG생활건강에서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 사장이 최근 대표이사를 맡았던 엘앤피코스메틱과 카버코리아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사장이 엘앤피코스메틱 미국법인장을 맡았던 2019년과 2020년 엘앤피코스메틱 미국법인의 매출액은 각각 7억원, 6억원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영업손실은 각각 20억원씩에 머물렀다. 미국 시장 진출 초기였기 때문에 성과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장이 물러난 후에도 엘앤피코스메틱의 미국법인은 지난해까지 매년 4~7억원 수준의 매출액을 내는 데 그쳤다. 엘앤피코스메틱은 지난해 미국법인을 정리했다.
카버코리아 역시 마찬가지다. 카버코리아의 매출액은 이 사장이 대표이사 취임 첫해였던 2021년 4505억원에서 마지막 해였던 2023년 3147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카버코리아의 영업이익 역시 2021년 816억원에서 628억원으로 줄었다.
다만 이는 K뷰티 트렌드가 메디힐, AHC가 아닌 다른 브랜드로 옮겨갔다는 점 등이 더 큰 변수였다는 시각도 있다. 대기업인 LG생활건강의 자원을 활용한다면 이 사장이 로레알 시절의 성공을 재현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화장품업계에서는 이 사장이 아마존·틱톡 등 글로벌 디지털 채널을 강화하고 북미 시장에서 히트 브랜드를 발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LG생활건강은 "이 사장은 글로벌 화장품 기업인 로레알 출신으로 다양한 브랜드 마케팅 및 사업 경험에서 나오는 탁월한 마케팅 감각을 발휘해 생활건강 화장품 사업의 스텝업(Step-up)을 이끌 수 있는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