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은 '넛지(Nudge)' 성격을 가진 산업으로 얘기된다. 넛지는 '옆구리를 슬쩍 찌르다', '주의를 환기시키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행동경제학에서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미국 시카고대의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Richard H. Thaler)와 법률가 캐스 선스타인(Cass R. Sunstein)이 공저한 '넛지(Nudge)'란 책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지만 유연하고 비강제적으로 접근해 자연스럽게 이끈다는 내용을 함의하고 있다.
그러나 보험산업에선 좋은 넛지(Positive Nudge) 보다 나쁜 넛지(Negative Nudge) 활용 사례가 더 많다. 지금까지 보험영업은 대부분 고객이 필요로 하지 않는 보장까지도 '옆구릴 찔러' 보험사, 설계사에게 유리한 상품 가입을 유도해 왔다. '넛지'의 저자 리차드 탈러 교수가 나쁜 넛지의 예로 보험을 들었을 정도다. 푸시영업, 공포마케팅으로 산업을 발전시키고 지탱해 온 것이다.
보험은 일반적인 금융상품과 다르게 스스로 필요성을 인식해 가입하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생활 속에서 익숙한 보험은 대개 가입 의무를 강제화한 보험들이다. 이렇다보니 보험산업은 성장을 위해 옆에서 계속 필요성을 인지시키는 '누군가'를 필요로 해왔다. 언택트(비대면)가 전사회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도 대면 판매채널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하며 온라인 보험 시장 점유율이 아직까지 미미한 이유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떨까. 코로나19를 통해 보험산업을 둘러싼 환경은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보험산업이 예상한 핀테크, 인슈테크(InsurTech, 보험+기술의 합성어) 시대가 10여년 앞당겨졌다 진단할 정도다.
보험사들은 고령화, 시장포화, 저금리 등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디지털 전환, 인슈테크와 협업을 통해 신(新)시장인 밀레니얼세대를 타깃한 변화를 모색해 왔다. 그러나 코로나19가 밀레니얼 세대에 한정해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던 핀테크, 인슈테크 시대를 앞당겼다. 모든 산업, 모든 세대에 언택트가 강조되면서 주 고객층인 4050세대까지의 변화도 포괄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여기에 디지털 환경에서 소비자와 이미 엄청난 접점을 이루고 있는 네이버, 카카오 등 빅테크(BigTech, 대형 정보통신기업)의 보험업 진출은 언택트 보험산업의 속도를 높이고 일상화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보험사가 예측하고 준비한 타깃과 속도는 이미 달라졌다. 빅테크의 보험업 진출을 단순히 새로운 판매채널로 인식하는 것이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박소정 서울대 교수는 최근 보험업계가 공동주최한 '언택트 시대 인슈어테크와 보험산업 전망' 세미나에서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이종산업과의 직접적 결합, 새로운 플레이어의 등장 등 보험산업이 그동안 겪지 못했던 산업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보험사가 빅테크의 보험업 진출 영향을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는 법인보험대리점(GA)의 탄생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온라인 이용자가 보험가입 대상으로 유입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빅테크는) 보험, 금융데이터뿐 아니라 고객 생활전반에 대한 데이터를 활용해 보험사 본연의 역할까지 경쟁하기 힘든 수준으로 진출해 올 수 있다"며 "보험사가 질 높은 데이터를 확보하고 스스로 생태계 마련과 경쟁력을 갖춰야 새로운 플레이어가 진입하는 상황에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빅테크가 제시하는 보험은 기존과 다를 수 있어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위험을 대비하는 보험상품에서 나아가 인지하지 못했던 위험들, 혹은 소비자가 필요성을 인지하는 순간 바로 눈앞에 제공하고 가입, 결제까지 빠르고 간편하게 할 수 있다. 개개인을 둘러싼 보다 정교한 데이터를 이용해 그에 맞는 위험을 예측하고 예방할 수 있는 보험상품을 만들어 보험에 대한 접근성을 한단계 다른 차원으로 높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험업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변화가 아직 시작단계이며 영향 역시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보험사 한 임원은 "영업현장에서 느끼기에 보험의 디지털 영향도는 아주 미미하다"며 "대면중심적인 비즈니스 룰이 일반적으로 굳어져 있고 비대면 규제 역시 대면중심으로 돼 있어 반응이 느리다"라고 말했다. 그는 판매채널이 비대면채널로 양분될 것에 공감하면서도 현재 보험산업이 푸시형 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가면 인슈테크는 요원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빅테크의 진출도 사실상 거대 GA와 다르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 판매가 늘어나면 더 높은 수수료를 요구할 것을 우려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이 보험사와 동일한 규제를 받아 단계적으로 진출이 이뤄질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언택트 시대 보험산업의 변화는 보헙업계의 예상처럼 단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당국도 규제샌드박스, 혁신금융서비스 등을 통해 새로운 플레이어들에게 규제 벽을 허물고 있다.
언택트 시대를 맞는 보험업계에 '거버넌스'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보험사와 협업한 경험이 있는 인슈테크기업 한 대표는 "새로운 시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놔도 보험사 내부에서 관철시키기가 쉽지 않았다"며 "사실상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보수적인 조직 구조 안에서 대부분 사장됐다"고 토로했다.
보험사 관계자 역시 "혁신기술을 지원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경영진단에 오르기도 전에 반려되는 일도 많아 사실상 새롭게 시도되는 것들은 거의 없다"며 "아직까지 내부 프로세스를 디지털화 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조직과 프로세스, 경영관리를 담당하는 보험사의 보수적인 거버넌스가 변화하지 않으면 혁신도 대응도 심지어 속도를 따라잡는 것조차 불가능할 수 있다. 외부의 환경변화, 충격에 대응하고 대비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변화는 필수적이다. 더욱이 앞으로 보험산업의 과제는 위험에 대한 사후보상에서 벗어나 위험을 사전에 관리하고 예방하는 차원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소비자들의 인식변화가 필요한 부분이며 보험자체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외부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내부의 변화는 필수불가결하다.
코로나19가 전세계 모든 생활패턴을 바꾸었듯 보험산업의 모습도 한순간에 뒤바뀔 수 있다. 김규동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언택트는 단순히 비대면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보험서비스와 상품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소비자와 보험사의 연결성이 더욱 강화되는 새로운 생태계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언택트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시대, 보험사가 이를 제대로 인식하고 대응방안을 세우지 않으면 스스로 만든 벽안에 고립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생태계와 플레이어의 진출 속에서 위기를 견디고 기회를 맞이할 충분한 준비가 되었는지, 거버넌스의 변화가 우선되었는지 되짚어 봐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