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H지수 ELS(주가연계증권)를 판매했던 은행들이 자율배상을 결정하는 분위기다. 우리은행이 가장 먼저 금융감독원의 분쟁조정기준안을 수용하기로 했고, 하나은행과 NH농협은행도 자율배상안을 마련해 신속한 배상절차에 돌입하기로 했다. 이사회를 앞둔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 등도 수용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은행권은 예상하고 있다.
이처럼 은행들이 자율배상에 나서는 것은 금융감독원이 선제적 자율배상 시 제재 감경 등을 고려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게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과거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제재 감경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일각에선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선제적 배상 시 제재 감경'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제재 수위를 두고 은행권과 거래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후 수습 노력, 얼마나 참작?
이복현 금감원장은 홍콩 ELS 사태 발생 후 가장 많은 상품을 판매한 은행권을 향해 지속적으로 '선제적 자율배상'을 강조했다.
검사결과 확인된 위법·부당행위에 대해선 관련 법규와 절차에 따라 엄중 조치한다는 방침이지만 해당 판매사의 고객 피해 배상과 검사 지적사항 시정 등 사후 수습 노력에 대해선 관련 기준과 절차에 따라 참작하겠다는 게 금감원 설명이다.
은행 입장에선 선제적 자율배상을 실시하면 자신들의 불완전판매를 인정하는 것이어서 부담이 커진다. 또 주주들로부터 과도한 손실 배상이란 평가를 받을 경우 경영진은 배임 등을 지적받을 수 있다.
이 같은 위험 요인에도 불구하고 은행 이사회가 금감원 분쟁조정기준안을 받아들이고 자율배상에 나서는 분위기가 형성된데는 과징금 감면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은행권 배상 규모가 1조원에서 많게는 3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과징금 규모도 조단위에 육박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소비자피해 배상 등 사후수습 노력은 제재 양정 시 고려요인의 하나로 감안할 수 있다지만 구체적인 기준은 아직 없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규정 상 사후수습 노력을 제재 양정 시 참작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라며 "아직 검사결과에 대한 보고조차 받지 못한 상황으로 제재와 사후 수습에 따른 감경 수준 등을 논하기에는 이른 시점"이라고 말했다.
은행 경영 '바로미터' 될수도
홍콩 ELS 사태와 비교되는 2020년 DLF 사태 당시는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 전이다. 당시 금융위원회는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은행(약 197억원)과 하나은행(약 168억원)에 과태료를 부과했고, 기관제재 수위로는 영업 일부정지를 결정했다.
또 DLF 판매 시절 은행장이던 손태승 전 우리금융그룹 회장과 함영주 현 하나금융그룹 회장에게는 문책경고 처분을 내렸다. 이후 손 전 회장과 함영주 회장은 징계 취소를 청구하는 행정소송을 시작했고, 함영주 회장은 최근 2심에서 1심을 뒤집고 승소했다. 이에 대해 금감원은 대법원에 상고하기로 했다.
이처럼 금감원 제재심이 과징금 뿐 아니라 주요 경영진의 향후 인사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은행권에선 선제적 자율배상 결정이 금감원의 제재 양정 시 어느정도 참작될지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홍콩 ELS 사태가 금융소비자법 시행 후 첫 사례로 불완전판매 등 논란이 또 다시 발생할 경우 이번 제재 수위가 바로미터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제재 감경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점에서 사후 수습 노력이 얼마나 반영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게 문제"라며 "현재로서는 당국 눈치를 보며 최대한 자율배상에 적극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금감원이 선제적 자율배상을 유도하기 위해 제재 감경을 지나치게 강조한 부분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사후 수습과 관련된 제재 감경 사유가 있지만 기준 등이 명확하지는 않다"며 "자율 배상을 제재 감경에 반영한다고 반복 강조하면서 마치 제재 수위를 두고 판매사와 거래하려는 모습으로 비춰진 점은 금융당국에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