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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계家]<25>연암·송정③곡절 많은 물장사 대물림

  • 2014.01.08(수) 10:20

박경복 전 명예회장 1968년 조선맥주 접수
2001년 하이트 주역 차남에 그룹대권 승계

우리나라 술 산업은 1945년 광복과 함께 제2의 창업기를 맞았다. 1910년대 주세법이 발효되며 술을 생산해 판매하는 주조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이래 전국의 거부(巨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주류업에 뛰어들었던 게 이 즈음이다.

삼성그룹 고(故) 이병철 창업주가 대구조선주양조를 인수하고 풍국주정을 설립해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고, 두산그룹 고 박승직 창업주의 장남 고 박두병 두산 초대 회장이 동양맥주를 사들인 것도 광복 직후의 일이다.

◇부산 술 재벌 대선주조 일가

‘한국에서는 역시 물장사라야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어떤 사업보다 남는 장사였던 1960년대 중반의 술 업계에 판도를 뒤흔들만한 일이 일어났다. 동양맥주(브랜드 OB)와 맥주 시장을 양분하던 조선맥주(크라운)에 새 주인이 나타났다.

1933년 대일본(大日本)맥주가 ‘삿뽀로’ 맥주를 생산하면서 출발한 우리나라 맥주 기업의 원조 조선맥주는 광복과 더불어 명성황후의 조카로 구한말 세도가였던 민영익씨의 증손자 민덕기씨가 사들여 경영했다. 이 조선맥주를 1966년 인수한 이가 대선주조 일가다.

대선주조 일가는 광복 직후 대선발효공업을 기반으로 부산 경제계의 실력자로 급부상한 고 박경영씨를 맏형으로 선기-경복-경규 4형제를 말한다. 박씨 집안이 향토 재벌이 된 것은 박경영씨가 정부 귀속재산 ‘신세계양조장(대선양조)’의 관리운영권을 맡게 되면서 부터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고 전쟁특수가 겹치면서 박씨 일가의 사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계열사만 해도 대선주조, 대선발효, 제주주정, 해운대 국제호텔 등 10여 개나 됐다. 지금은 다소 낯선 이름의 술들이지만, ‘다이야몬드소주’, ‘다이야맥주’ 등을 만들던 곳이 대선주조 박씨 집안이다.

◇동생 회사 인수한 형

▲ 고 박경복 전 하이트진로그룹 명예회장
조선맥주 인수를 계기로 박씨 집안의 사업 본류(本流) 또한 완전히 바뀌게 된다. 대선발효를 기반으로 하나 둘 늘려나갔던 회사들은 1970년대에 거의 대부분 다른 주류업체에 팔리거나 정리됐지만, 조선맥주는 오히려 일가의 상징으로 튼튼히 뿌리를 내렸다. 특히 대선주조 계열사들은 형제들이 돌아가며 분할경영했던 것과 달리 조선맥주는 온전히 셋째 고 박경복(1922~2007) 전 하이트진로그룹 명예회장의 것이 되었다.

조선맥주를 기반으로 2005년 옛 진로소주까지 인수한 하이트진로그룹은 대표적인 맥주 브랜드 ‘하이트’와 소주 ‘참이슬’을 가진 주류 재벌로 성장했다. 지난해 2조125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계열사만 하더라도 지주회사 하이트진로홀딩스, 사업 주력사 하이트진로, 하이트진로사업, 진로소주 등 13개사에 이른다.

하이트진로그룹이 재계 서열 30위권(공기업 및 민영화된 공기업 제외) 반열에 오르기까지 주춧돌을 놓은 이가 박경복 명예회장이다. 하지만 그가 조선맥주를 키우고 이를 2세들에게 물려주기 까지는 남다른 사연도 많았고 뜻밖의 곡절도 많았다.

그가 처음부터 조선맥주의 주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당초 대선주조 일가에서 조선맥주를 인수한 이는 동생 박경규씨였고, 초대 사장으로 앉은 이도 그였다. 박 명예회장은 대선발효 회장으로 있으면서 조선맥주 경영에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생이 1년7개월 되던 1968년 46세의 나이에 작고하자 직접 사들여 사장에 오르고 1987년에는 회장에 올랐다.

◇이름까지 갈아치운 열풍

▲ 박문덕 하이트진로그룹 회장

동양맥주(1933년 12월 소화기린맥주) 보다 넉달 먼저 설립된 조선맥주는 박 회장에게 인수된 뒤에도 매년 꾸준히 성장했다. 경제개발로 국민의 살림살이가 나아져 그만큼 소비가 많아진 게 주된 배경이다. 게다가 동양맥주 외에는 다른 라이벌이 없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동양과 조선은 맥주시장을 6대 4의 비율로 황금분할하며 오랫동안 평화공존 시대를 구가했다.

그는 조선맥주를 기반으로 계열사들도 차례차례 늘려갔다. 1973년 맥주 유통망 확보를 위해 근대화유통을 설립하고, 1975년에는 병 제조 업체 동서유리공업을 차렸다. 1982년에는 청주회사 금관청주를 인수하기도 했다. 

박 회장은 조선맥주를 인수한지 25년만인 1993년 새로운 도박을 감행했다. ‘천연 암반수’를 콘셉트로 ‘하이트’를 출시했다. 동양맥주가 속한 두산그룹에서 국가적 환경 이슈를 불러일으킨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이 일어난지 1년 만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하이트는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고, 1996년에는 만년 2위라는 불명예도 벗어던졌다. 곧바로 국내 맥주의 간판상품이자 장수 브랜드였던 ‘크라운’이 자취를 감추고, 나아가 1998년 6월 아예 사명을 하이트맥주로 변경한 것만 봐도 당시 하이트 열풍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하이트 개발의 주역이 박 회장의 2남1녀 중 차남인 당시 박문덕(64) 사장이었다. 라이벌 OB를 제치고 업계 선두자리에 오르도록 만든 일등공신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것은 자연스런 수순일는지 모른다. 박 명예회장이 2001년 그룹 대권을 차남에게 쥐어주고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남으로써, 하이트진로그룹은 2대 경영시대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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