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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던 유력 후계자
고(故) 박경복(1922~2007) 전 하이트진로그룹 명예회장의 2남1녀 중 장남인 그는 배재고와 한양대 기계과, 미국 노틀담대 기계경영학과를 졸업했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는 지금의 하이트진로그룹이 뿌리를 두고 있는 조선맥주(현 하이트진로)에 입사해 이사·전무·부사장을 거쳐 40세 때인 1987년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나라 재계의 대물림이 전통적으로 ‘장자 승계’가 주류인 까닭에, 그가 훗날 조선맥주를 물려받았을 것이란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듯 하다. 그는 2년여 뒤인 1989년에는 ‘넘버2’인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단 몇 년 만에 급격하게 상황이 바뀐다. 3살 아래 동생 박문덕(64) 현 하이트진로그룹 회장이 1991년 부사장에서 조선맥주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것이다. 부친이 동생에게 지분을 대거 증여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동생은 이듬해 10% 이상 주요주주로 등장했고, 그 해 말에는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시 박문효 부회장은 1975년 조선맥주가 당시 맥주 브랜드 ‘크라운’ 생산에 필요한 맥주병을 자급하기 위해 만든 주변 계열사일 따름이던 동서유리공업, 지금의 하이트진로산업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누가 보더라도 조선맥주는 차남에게 넘어갈 게 불 보듯 뻔한 수순이었다.
실제로 동생은 이후로도 승승장구했다. 1999년 부회장에 올랐고, 51세 때인 2001년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를 계기로 박문효 회장은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동생에게 그룹 대권이 넘어가자 그는 남아있던 2% 가량의 하이트진로(당시 하이트맥주) 지분도 모두 팔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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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 해프닝’ 톰보이
동생이 그룹 계승자로서 2대 경영시대를 꽃피우는 동안 형은 조금씩, 정말 눈에 띄지 않게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갔다. 동생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밝을수록 형을 가리는 어둠은 더욱 짙어갔다. 그러던 그가 근래에 잠깐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워낙 조용히 지내온 그가 그룹과 하등 관련 없는 의류업체 톰보이의 주요주주로 부상했으니 그만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2010년 7월 톰보이는 만기가 돌아온 어음 17억원을 결제하지 못해 부도가 났다. 이 회사는 정리매매를 거쳐 주식시장에서 사라졌고, 회생을 위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부도가 나기 며칠 전 이 회사 지분 8%를 사들인 이가 바로 박 회장이다. 당시 그는 매입 배경을 개인적인 단순 투자라고 밝혔지만, 최대주주(19%) 다음으로 많은 지분이다 보니 경영권 인수를 염두에 둔 게 아니냐는 등 말들이 많았다.
톰보이는 2011년 10월 법정관리 상태에서 신세계인터내셔널에 인수돼 현재 신세계그룹에 편입돼 있다. 결과적으로 그의 톰보이 지분 인수는 ‘반짝 해프닝’에 불과했고, 그 또한 ‘변방’의 계열사를 경영하고 있는 본래의 조용한 오너 일가 이미지로 되돌아갔다.
◇연암·송정에 쏟는 부정
박 회장이 ‘회장’ 직함을 갖고 있는 하이트진로산업은 지금도 총자산(2012년 1420억원)이 그룹 주력사 하이트진로의 24분의 1에 불과하다. 영위하고 있는 사업도 맥주 ‘하이트’, 소주 ‘참이슬’ 등 하이트진로가 만드는 각종 주류의 유리병이나 컵, 잔, 상표라벨, 포장상자 등을 공급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박 회장은 그룹 내에서 이 하이트진로산업의 등기임원으로만, 그것도 동생과 같이 이름이 올라가 있을 뿐이다. 대표이사는 따로 있다. 게다가 이 회사 주식을 단 한 주도 갖고 있지 않다. 생맥주 냉각기 업체 서영이앤티(E&T) 5%를 제외하고는 그룹내 다른 계열사 지분도 전혀 없다.
그러나 비록 그룹에서 실권(實權)과 먼 거리에 있는 오너 일가일 따름이지만, 부정(父情)에 관한 한은 박문효 회장도 동생 못지 않다. 아들 형제 세진(37)·세용(31)씨가 사업가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자식들을 향한 그의 노고를 느낄 수 있는 회사가 하이트진로그룹의 방계기업 연암과 송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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