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이 정기인사를 통해 고(故) 조양호 전 회장의 시대가 저물고, 본격적으로 조원태 회장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석태수 대한항공 부회장 등 아버지 측근으로 분류되는 임원들을 승진 인사에서 배제하는 대신 조 회장의 측근 인사들을 대거 승진시킴으로써 '온전한 조원태 제체'를 구축했다.
친 누나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복귀도 미뤄졌다. 안정적인 3세 경영을 위해 총수 일가가 조 회장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진그룹이 지난달 29일 실시한 '2020년 정기 임원인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석태수 한진칼 대표이사 부회장을 비롯해 서용원 한진 대표이사 사장, 강영식 한국공항 대표이사 사장 등 고(故) 조양호 전 회장의 사람들로 분류된 인사들중 상당수가 대거 퇴진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스스로 용퇴 의사를 표하고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부친 세대의 용퇴와 함께 조 회장은 자신의 측근 인사들을 전진 배치했다. 대한항공 근무 시절부터 조 회장을 보좌해 온 우기홍 대한항공 부사장을 사장으로, 한진정보통신 근무 당시 인연을 맺은 장성현 대한항공 전무를 마케팅·IT 부문 부사장으로 각각 승진시켰다.
다만 석 부회장은 한진칼 대표이사 사장직을 지켰다. 한진칼은 한진그룹 총수 일가와 2대주주인 행동주의 사모펀드 KCGI간의 경영권 분쟁이 한창인 곳으로, KCGI는 올 초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석 부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을 반대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 부회장이 자리를 지킨 건 KCGI 공세에 대한 조원태 회장의 일종의 자신감으로 보인다.
조원태 회장은 지난달 뉴욕특파원 대상 기자 간담회에서 "최대주주 지분은 (조양호 전 회장 별세 이전과) 같다"며 "결국 우호지분을 확보하는 게 가장 중요한 데 현재로선 쉽게 대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조 전 회장의 지분 상속 이후 한진칼 지분은 조원태 회장이 2.32%에서 6.46%, 누나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2.29%에서 6.43%, 동생 조현민 한진칼 전무가 2.27%에서 6.42%, 어머니 이명희 정석기업 고문이 0%에서 5.27% 등으로 늘어났다.
이로써 한진칼 지분율은 조 회장 등 특수 관계인 지분이 28.93%로 가장 높다. 그 다음으로는 KCGI(15.98%), 미국 델타항공(10.00%), 반도건설(5.06%) 순이다. 여기서 델타항공이 조 회장 측의 우호지분으로 작용할 경우 최대주주와 KCGI와의 지분 격차는 더 벌어진다. 경영권 분쟁 자체가 성립되기 어렵다.
다만 조 회장이 지금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선 어머니를 비롯한 누나와 동생의 지지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조 회장이 친 누나인 조현아 전 부사장을 경영에 다시 참여시킬 것으로 내다봤다. 경영 승계를 두고 불화설이 돌던 가족들을 경영에 복귀시켜 완벽한 우군으로 확보할 경우 KCGI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조 전 부사장은 이번 인사에서 제외됐다. 일각에 따르면 총수 일가 내부에서 조 전 부사장의 복귀는 아직 이르다고 판단, 잠시 미루도록 가족간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 전 부사장은 최근 이혼 소송 과정에서 상해·아동학대 등의 혐의로 남편에게 고소를 당하는 등 개인사가 아직 시끌시끌한 상황이다. 3세 경영의 안정화를 위해 경영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또 다시 가족 문제로 구설에 오르는 것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한진그룹 인사는 조원태 회장의 지배력과 장악력을 강화하는데 중점을 둔 인사로 평가된다"며 "경영 승계 과정에서 갈등을 겪었던 가족들 또한 한진그룹의 후계 경영의 안정화를 위해 조 회장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는 모습"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