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 항소심 판결을 두고 최 회장 측과 재판부 간 공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최 회장 측이 기자회견을 통해 "재판부가 재산분할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치명적 오류'가 있었다"고 주장했고요. 재판부는 "중간과정에서의 계산 오류일 뿐 재산분할에 실질적 영향이 없다"며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이 과정서 이목이 쏠린 부분은 ㈜SK 주식 가치 성장에 있어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 기여도'와 '최 회장 기여도'가 얼마인지에 대한 숫자 싸움이었습니다. 물론 관건은 해당 오류가 얼마나 치명적인가에 있습니다.
지난 5월 30일 서울고법 가사2부(부장판사 김시철)는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재산분할 1조3808억원 및 위자료 2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재산분할 규모 총 4조115억원 가운데 노 관장 기여분으로 35%가 인정된 것입니다.
부부 공동재산 범위에는 △최 회장이 보유 중인 주식 △최 회장이 모친에게 받은 미술품 △최 회장이 동거인에게 지출한 금액 등이 포함됐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주식입니다.
특히 그룹 지주사인 ㈜SK 주식 규모가 막대합니다. 최 회장은 ㈜SK 지분 17.73%를 보유한 최대주주인데요. 해당 지분 가치만 2조원대에 달합니다.
최태원 회장 '나는 승계상속형 사업가' 주장하는 이유
최 회장 측이 지적한 부분은 ㈜SK의 모태가 되는 '대한텔레콤*' 주식 가치 산정 오류입니다. 선대회장 별세 무렵인 1998년 5월경 주당 가치 '1000원'이 '100원'으로 판결문에 적시돼 있다는 겁니다.
*대한텔레콤은 SK그룹을 지주사 체제로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곳입니다. 대한텔레콤은 1991년 SK그룹이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설립했던 회사로, 2009년 11월 SK C&C로 사명을 바꿔 상장됐습니다. 이후 2015년 ㈜SK와 합병됐습니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1988년 9월 노 관장과 결혼식을 올린 최 회장은 1994년 11월 대한텔레콤 주식을 최초로 취득합니다. 당시 주당 가격은 400원이지만 2007년과 2009년 등 두 차례 액면분할 한 것을 감안(50분의 1 비율로 축소 환산), 실질적으로 8원에 구매했다는 계산입니다.
그리고 2009년 대한텔레콤이 SK C&C로 사명 변경 후 상장했을 때 주당 가치는 3만5650원입니다. 최초 구매가 8원에서 3만5650원까지, 4456배가 뛰었습니다.
문제는 그 사이 '1998년' 시점입니다. 앞서 설명했듯 이때는 최 회장의 아버지인 최 선대회장이 별세했을 무렵입니다. 당시 주당 가격은 5만원. 두 차례 액면분할을 고려하면 주당 실질 가치는 1000원이 됩니다.
주당 가치가 8원에서 1000원으로 125배 상승한 것은 아버지의 기여도, 1000원에서 3만5650원으로 35.5배 성장한 것은 본인의 기여도라는 겁니다.
이를 통해 최 회장 측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승계상속형 사업가'라는 데에 있습니다. 본인이 자수성가형 사업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노 관장 기여도가 과대평가됐다는 주장입니다. 결국 "재산분할 대상 및 비율 등 결론을 다시 도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입니다.
재판부 "중간과정 계산 착오…근본 논리 영향 없어"
재판부도 수치 오류에 대해선 인정했습니다. 판결문 내 숫자를 수정(경정)해 양측에 다시 송달했습니다. 하지만 "기존 판결의 본질에는 영향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례적으로 언론사에 설명자료도 배포했습니다.
재판부 입장은 이렇습니다. 일단 최 회장이 '1998년'을 기점으로 아버지와 본인의 기여도를 계산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 없다는 겁니다. 애당초 선대회장 재임 시절에도 노 관장의 아버지인 고(故) 노태우 대통령의 유·무형적 지원이 있었다고 판시했기 때문입니다. 선대회장에서 최 회장으로 경영 활동이 이어지는 배경에서마저도 노 관장 일가의 기여를 무시할 수 없다는 판단입니다.
SK C&C가 상장한 2009년 역시 중간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이혼 소송 시 재산분할 기준이 되는 시점은 '사실심 변론종결시'라는 이유에서입니다. 앞서 재판부가 재산분할 규모를 산정했을 때에도 항소심 마지막 변론기일이었던 '올해 4월 16일'을 기준으로 계산했습니다.
지난 4월 16일 ㈜SK 주가는 16만원입니다. 8원에서 16만원. 최 회장이 보유한 ㈜SK 주식 가치가 2만배 성장한 데에 있어 노 관장 측 기여가 35% 가량 된다는 입장을 재판부는 고수하는 겁니다.
'자수성가형 사업가'와 '상속승계형 사업가'라는 개념은 최 회장 측이 먼저 제시한 것인데, 임의적 구분이라 근거 없다는 게 재판부 설명입니다. 재판부가 판결문에 해당 단어를 적시 및 인용한 까닭도 최 회장 측 주장을 반박하는 차원이었다는 취지입니다.
이어 재판부는 "만일 선대회장과 최 회장 간 기여도를 비교하려면 올해 4월을 최종 기준 시점으로 삼아 '125배:160배'라는 결과가 나온다"고 부연했습니다.
혼인 기간 중 보유한 주식, 최종 가치 판단 기준은?
이러한 재판부 입장에 최 회장 측은 또다시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실제 혼인이 파탄난 시점을 2019년이라고 보면서도 노 관장 측 기여도를 2024년까지 인정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게 골자입니다.
"재판부가 당초 기여도 '12.5대 355'를 기초로 1조3808억원의 재산분할 지급액을 결정했다면 이번 수정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냐"는 게 최 회장 변호인단 주장입니다.
법조계 내에서도 평가는 엇갈립니다. 우선 파기환송 가능성을 열어준 것에 대한 지적입니다. 안 그래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판결인데 논쟁의 여지를 남김으로써 혼란을 야기했다는 거죠.
가정법원 판사·법무부 송무심의관 출신 정재민 변호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혼소송 판결 오류에 대해 "중대한 판결 변경 가능성이 있는 것이며 경정 대상이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대한텔레콤 가치가 100원이 아닌 1000원이라면 최 회장과 노 관장의 기여도가 낮아진다"며 "중요한 부분에 대한 오류가 있는데도 재산분할 비율에 영향이 없다는 것은 납득이 어렵다"고 덧붙였습니다.
반면, 이번 항소심 판결문이 200페이지가 넘는 양임을 고려했을 때, 최 회장 측이 문제 삼는 부분은 지엽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도 나옵니다. 선대회장과의 기여도 비교 수치가 재산분할 지급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아니어서 대법원서 판결이 뒤집히기 힘들 것이란 얘기입니다.
가정법원 부장판사 출신 이현곤 변호사(법무법인 새올)는 "항소심 재판부 판결의 본질은 선대회장 때부터 현재까지 SK그룹 성장에 있어 노 관장 측의 금전적 기여를 비롯 외적인 도움이 작용했느냐 여부"라며 "이혼 시 재산 가치를 산정하는 기준은 사실심 변론종결시이므로 '사실상 혼인 파탄 시점'을 논할 이유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4월 16일 기준 ㈜SK 주가 16만원'은 재판부가 판결문 낭독 및 판결 이유를 설명하던 지난 5월 30일 당시 이미 언급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가정법원 부장판사 출신 윤지상 변호사(법무법인 존재)도 "최 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 가격이 중간에 어떻게 변했는지는 이번 판결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윤 변호사는 "이미 예전부터 혼인 기간이 긴 일반인들의 이혼 소송에서 주식은 부부공동재산에 포함돼왔다"며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재산분할 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특별 기준을 적용해선 안 되고 일반적인 사례와 동일하게 판단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고 덧붙였습니다.
최 회장 기자회견 직후 노 관장 측이 "현재 최 회장의 보유 지분의 막대한 가치상승은 부정할 수 없어 결론엔 지장 없다"며 "차라리 판결문 전체를 공개하자"고 맞받아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힙니다.
재산분할 소송, 내년까지 이어질까
반박에 재반박까지 이어진 최 회장 측 전략에 대해서도 평가가 갈리고 있습니다. 일단 최 회장 측이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는 최소 '대법원 심리속행'일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인데요. 상고장을 제출하기도 전 기자회견을 열어 이목을 집중시킨 까닭도 대법원을 압박하기 위함 아니냐는 해석이 나옵니다.
최 회장 측이 이번 주 중 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하면 이후 대법원은 올해 말까지 심리속행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심리속행으로 가닥이 잡히면 대법원 재판부가 법리를 따져 파기환송 등을 살피고요. 만일 심리불속행으로 상고 기각되면 재산분할 소송은 해당 시점으로 종료됩니다.
일각선 '이해하기 힘든 행보'라는 지적도 제기됩니다. 이현곤 변호사는 "판결을 뒤집기 위해선 항소심 재판부가 말한 본질, 즉 SK그룹 성장에 노태우 비자금 및 처가 도움을 받은 적 없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예컨대 최종현 선대회장이 당시 계열사 비자금 300억원으로 태평양증권(현 SK증권)을 인수했다면 그 증거를 내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이에 대해 최 회장 및 SK그룹 측은 "계열사 비자금이 태평양증권 인수자금으로 활용된 것은 맞지만, 비자금 조성 관련 증거는 현재 갖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