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그룹이 다시 '경영의 본질'로 향한다. 최근 SK텔레콤 유심 정보 유출 사태는 방만한 사업 운영과 무분별한 인수합병(M&A) 관행을 정면에서 들춰냈다. 이에 그룹 스스로 내린 진단은 '기본기의 실종', 해법은 '본원적 경쟁력의 회복'이었다. 지난 13~14일 이천 SKMS연구소에서 열린 경영전략회의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비롯한 주요 경영진 20여명은 "이제는 본질로 돌아갈 때"라는 데 뜻을 모았다.
경영전략회의는 8월 이천포럼, 10월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와 함께 SK그룹의 3대 핵심 연례행사로 꼽힌다. 이번 회의에는 최 회장을 비롯해 최재원 수석부회장, 최창원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등 그룹 주요 경영진이 대거 참석했다. 최 회장의 장녀인 최윤정 SK㈜ 성장지원담당 겸 SK바이오팜 사업개발본부장(부사장)도 자리해 이목을 끌었다.
이번 회의의 화두는 단연 '신뢰 회복'이었다. SK 경영진은 "고객의 신뢰는 SK그룹이 존재하는 이유"라며 "운영의 기본과 원칙을 소홀히 한 것이 위기의 본질"이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회의장에는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의 육성도 울려 퍼졌다. "경영은 소프트웨어를 가다듬는 일"이라는 최 선대회장의 메시지는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번 회의의 방향성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이날 경영전략회의에서는 지난 1년 반 동안 추진된 그룹 차원의 리밸런싱 성과가 집중 점검됐다. 이 기간 SK는 21개 계열사를 정리하고 순차입금 8조원을 덜어냈다. 2023년 말 83조원이던 부채는 2024년 말 75조원까지 줄었고, 그룹 부채비율도 134%에서 118%로 16%포인트(p) 하락했다. 여기에 올해 1분기 SK㈜의 순차입금이 2조4000억원 추가 감소한 점까지 감안하면 그룹 전체 차입금은 누적 기준 10조원 안팎 줄어든 것으로 분석된다. 리밸런싱의 속도와 강도 모두 전례 없는 수준이다.
재무개선 속 실적 쏠림…SK '전략적 과제' 선명해지다

재무구조는 달라졌지만 실적 구도는 바뀌지 않았다. SK하이닉스가 독주하는 사이, SK이노베이션과 SK㈜는 뒷걸음질치며 리밸런싱의 그늘을 여실히 드러냈다.
올 1분기 SK하이닉스는 7조4405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157.8% 급증했다. 영업이익률은 42.2%에 달했고, SK그룹 10개 주요 비금융 계열사의 전체 영업이익 가운데 무려 74%를 혼자서 책임졌다. AI 서버 수요 확대에 힘입은 HBM3E 12단 제품 출하와 북미향 매출 확대가 실적 급등을 견인했다. SK스퀘어도 1조6523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전년 대비 410% 급증했다. 하이닉스 지분법 이익과 ICT 자회사 실적 개선이 복합 작용했다.
반면 실적의 무게중심은 극단적으로 쏠렸다. SK㈜는 3997억원의 영업이익에 그치며 전년 대비 72.8% 급감했다. SK이노베이션 부진에 더해, SK하이닉스의 실적이 연결 구조상 SK스퀘어에 먼저 반영되는 탓에 SK㈜의 실적 개선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SK이노베이션은 446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적자로 돌아섰다. SK E&S와의 합병으로 매출은 10분기 만에 최대치를 찍었지만 △국제유가 하락 △정제마진 축소 △화학 시황 악화라는 '삼중고'에 수익성이 급격히 흔들렸다. 석유사업 영업이익은 5911억원에서 363억원으로 급감했고, 배터리사업도 2993억원 손실을 내며 적자 폭을 키웠다.

이에 SK그룹은 구조조정의 강도를 더욱 끌어올리고 있다. 1년 반 전부터 이어온 리밸런싱의 속도와 범위는 최근 들어 한층 더 강화되는 양상이다. 최창원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을 중심으로 시너지가 없는 사업은 수익성과 관계없이 과감히 매각하고, 중복 사업은 통합하는 전사적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최근 SK브로드밴드는 SK C&C의 데이터센터를 인수해 인프라를 통합했고, SK에코플랜트는 SK머티리얼즈 산하 반도체 소재 자회사 4곳을 흡수해 사업 시너지를 키웠다. 대신 리뉴원과 리뉴어스 등 비핵심 자산은 시장에 매물로 내놨다.
매각으로 9조 확보…AI·에너지에 80조 투입
성과도 가시화되고 있다. SK스페셜티와 SK렌터카 등 알짜 자산 매각으로만 4조4459억원을 확보, 현재 진행 중인 SK실트론 및 리뉴어스 매각까지 더하면 확보 재원은 9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그룹은 오는 2027년까지 총 80조원의 미래 투자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이 같은 전사적 리밸런싱 기조의 배경에는 최태원 회장의 '본원적 경쟁력' 철학이 자리한다. 그는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근본적 경쟁력, 즉 본원적 경쟁력은 기본에서 시작한다"고 줄곧 강조해왔다.
이날 회의에서도 경영진은 "리더들이 먼저 '수펙스' 환경을 조성해 구성원 모두가 패기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결의했다. '수펙스(SUPEX·Super Excellent Level)'는 끊임없는 노력과 혁신을 통해 최고 수준을 추구하는 SK 고유의 경영철학이다.
확보된 자금은 인공지능(AI)과 에너지를 양대 축으로 한 미래 사업에 집중 투입된다. 핵심은 단연 SK하이닉스다. 회사는 2030년까지 총 82조원을 투입해 반도체 밸류체인 강화와 AI 인프라 확장에 나선다. 울산에 건설 중인 103㎿ 규모 AI 전용 데이터센터는 향후 1GW급으로 확장, 동북아 최대 AI 허브로 키운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에너지 부문에서는 SK이노베이션이 전면에 나선다. SK E&S와의 합병을 통해 자산 105조원의 아시아·태평양 민간 최대 에너지 기업으로 재편된 만큼, 해상풍력·에너지저장장치(ESS)·소형모듈원자로(SMR) 등 차세대 에너지 사업이 본격 추진된다.
SK 관계자는 "그룹의 실질적 변화를 시장과 이해관계자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전사적 실행력을 한층 강화하기로 했다"며 "이를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이해관계자들과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