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응답하라! 혁신]죽은 업계를 살리다…'이키지'의 비밀

  • 2019.06.07(금) 16:53

[창간6주년 특별기획]
오우미 사치코 '이키지' 브랜드 매니저 인터뷰
"작지만 최고끼리 뭉쳐…해외에서 먼저 인정"
십시일반 모여진 협력…사양 산업 일으킨 '활력'

"아주 작은 분야에서라도 최고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조금씩 개선을 해나가다 보면 여러 가지가 쌓이면서 성과가 나타난다고 봅니다. 청소를 가장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청소할 때는 모두가 그 사람부터 찾지 않겠어요?"

일본 스미다구의 지자체 의류 브랜드 '이키지(粋事·IKIJI)'의 오우미 사치코(近江 祥子) 매니저의 말이다. 이키지는 일본 의류 제조 분야에서 최고를 자처하는 세이코 테루타 윈스로프 니노미야 등 중소기업 4곳이 모여 만들었다. 각자 특화 영역을 살려 셔츠 니트 가죽 등 제품을 만들면 이 브랜드로 통합 출고된다.

상당 부분 수입대체화가 이루어진 봉제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으로 택한 이키지 브랜드가 론칭한지 약 8년이 지났다. 그 사이 이키지는 일본 중앙정부 보고서에서 제조업 성공사례로 거론될 만큼 국내외 주목을 끌어왔다. 현재는 독특한 디자인과 높은 품질 등을 전면에 내세워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해외 판로 개척에 주력하고 있다.

사양 산업 분야로 분류되던 봉제 업계에서 이들이 주목받게 된 것은 이들만의 혁신이 통했기 때문이다. 비즈니스워치는 지난달 30일 도쿄 스미다구 내 이키지 매장에서 오우미 사치코 매니저를 만났다. 오우미 매니저는 봉제 업체 세이코(精巧)의 3세 경영자로 이키지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다.

이키지(IKIJI) 브랜드 론칭에 참여한 기업 관계자들의 기념사진 [사진=윤도진 기자/spoon504@]
작지만 최고가 모여 만든 브랜드…'실력'으로 부담 떨쳐

오우미 매니저가 소속된 세이코는 내년이면 창업 70주년을 맞이한다. 시기 별 부침은 있지만 대개 종업원 50여명 수준을 유지하면서 대기업 위탁생산에 주력해 왔다. 10여년 전 도쿄의 새로운 랜드마크 타워 역할을 할 스카이트리가 이 지역에 들어서기로 결정되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당시 스미다구는 스카이트리 건설을 계기로 지자체 브랜드화를 추진하기 위해 관련 위원회를 발족했고 오우미 마코토 현 세이코 사장이 당시 위원회에 참가하게 됐다. 일본 내 유명 인사들이 모인 위원회에서 여러 교류가 이뤄지던 터였다.

"매년 규모가 축소하고 있는 봉제 산업에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고요. 예전부터 독자적 브랜드를 론칭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원회 내 교류 과정에서 그 마음이 커진 것이죠"

오우미 사치코 이키지 프로젝트 매니저가 비즈니스워치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윤도진 기자/spoon504@]

1950년부터 꾸준히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서 길러온 실력이 때를 만난 것. 부담이 없지 않았지만 지자체가 중개에 열심이었다. 같은 지역 내 뛰어난 제조 기술을 갖고 있던 기업들이 브랜드 론칭에 관심을 보였다. 혼자 힘으로는 어렵지만 각 분야 최고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모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렇게 뜻을 모아 탄생한 브랜드가 이키지다. '이키(粋)'는 일본 전통 미의식을 뜻한다. 에도 시대 공예 장인들이 모여살던 지역 정체성을 반영했다. 매화꽃에 얼굴을 그려 넣은 마크를 로고로 삼았다. 걸치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길 바란다는 희망이다.

"봉제 산업이 작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일본이 기술적 측면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해야 하는 영역이 상당 부분 존재하고요. 디자인을 이해하고 패턴을 합치는 등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독자적 기술은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해외에서 먼저 승부수…도전이 긍정적 변화 이끌어

하지만 대형 기업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무작정 기술만으로 덤비기에는 아무래도 무모했다. 기술에 자신이 있는 만큼 이름보다 기술을 중시하는 해외에서 실력으로 인정받은 뒤 일본 국내로 역진출하는 전략으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일본인 1명이 1년에 36벌의 옷을 사지 않으면 시중에 나와 있는 재고를 전부 소화하지 못할 것이란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그만큼 상품이 남아 도는 시대인 것이죠. 이 상황 속에서 인지도를 높이는 것은 무모한 일일 수 있습니다. 기술력을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싶은 측면도 있고요"

다행히 해외 반응은 좋은 편이다. 품질은 물론 디자인에 대한 호평도 많았다. 현지 기업으로부터 수주를 받은 것은 뚜렷한 성과 중 하나다. 오우미 매니저는 "사회가 비슷해도 물리적 거리가 있기 때문에 일일이 대응하기 힘든 측면이 있지만 조금씩 성과를 높여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스미다구 료고쿠 지역에 위치한 이키지 매장 [사진=윤도진 기자/spoon504@]

이를 위해 생산 공장은 여러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필요한 물량을 필요한 때 만들어내는 다품종 소량생산 식의 '도요타 생산방식'을 받아들여 매월 품목당 30여벌씩 60여 품종을 생산한다. 3D 캐드 기술을 도입해 착용감을 높이기 위한 수단도 고민하고 있다.

임금 수준도 대폭 끌어올려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 노력 중이고 인터넷 등을 통한 판로 확장 시도도 하고 있다. 최근 한 대학 졸업생이 이키지 상품을 보고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온 것은 또 다른 성과다. 회의적 태도를 벗고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한 계기가 됐다.

세이코의 최근 매출액은 우리나라 돈으로 153억원가량이다. 이중 OEM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90% 이상이지만 이키지 론칭은 기업과 거래처는 물론 지자체로까지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평가다. 인터뷰를 함께 진행한 구청 직원은 연신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사실 저는 가업을 이을 생각은 하나도 없었어요. 저 좋은 일만 열심히 하고 살았거든요. 여러 사정이 있어 부모 친척이 세운 가업을 잇게 됐는데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혁신을 말하기에는 거창하고요. 조금씩 개선해나가는 것, 그것이 과제입니다"

혁신(革新). 묵은 제도나 관습, 조직이나 방식 등을 완전히 바꾼다는 의미다. 과거 한국 기업들은 치열한 변화를 통해 성장을 이어왔고, 유례를 찾기 힘든 역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성장공식은 이미 한계를 보이고 있다. 성장이 아닌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로 몰리고 있다. 비즈니스워치가 창간 6주년을 맞아 국내외 '혁신의 현장'을 찾아 나선 이유다. 산업의 변화부터 기업 내부의 작은 움직임까지 혁신의 영감을 주는 기회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시점. 그 시작은 '혁신의 실천'이다. [편집자]

naver daum
SNS 로그인
naver
facebook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