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을 깎아주는 정책은 '양날의 검'이다. 혜택을 받는 사람은 감세의 달콤한 맛을 즐기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심리적 박탈감을 느낀다. 이 때문에 세금 감면에는 조세 형평성 논란이 항상 따라붙는다.
정부와 국회의 시각도 완전히 다르다. 기획재정부는 웬만하면 비과세·감면을 없애려고 하지만, 국회의원들은 지역 유권자를 겨냥한 세금 감면 법안을 쏟아낸다. 납세자를 위한 형평성과 생색내기 사이의 경계선이 모호하게 그어져 있다.
세금 제도를 바꿔야 할 법안들은 '유사품'에 멍들고 있다. 대부분 연말에 사라질 세금 감면 법안을 연장하자는 내용인데, 똑같은 취지의 법안이 5개나 중복된 경우도 있었다. 다수의 국회의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법안인 만큼, 통과할 가능성은 점점 높아진다.
한편에서는 선거를 의식한 실적 경쟁의 결과물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어차피 통과될 법안에 숟가락 하나만 얹어서 실적을 올린다는 지적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치열한 입법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대표적 세법 개정안들을 살펴봤다.
◇ 면세유를 연장하라
일반인이 석유를 구입하면 절반에 달하는 유류세(개별소비세, 부가가치세 등)를 내야하지만, 농어민이 농기계나 어선에 넣는 석유에는 세금이 붙지 않는다. 1972년부터 도입된 면세유 제도는 연간 2조원에 달하는 세금을 농어민들로부터 받지 않고 있다. 바꿔 말하면 국가에서 세금 2조원을 농어민들에게 풀어 가계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세금 감면 제도는 무분별한 퍼주기를 막기 위해 일몰 기한을 두고 있는데, 면세유 제도의 경우 법적으로 올해 말까지만 적용된다. 이 때문에 주로 농어촌을 지역구로 둔 국회의원들이 면세유 제도를 연장하자는 법안을 내놓는다.
새누리당 홍문표 의원(충남 홍성·예산)은 지난 달 31일 면세유 조항을 2025년 말까지 10년 연장하자는 법안을 냈다. 같은 당 김종태 의원(경북 상주)은 이미 지난해 9월에 '10년 연장' 법안을 똑같이 제출했다.
하지만 '원조'는 새정치민주연합 김재윤 의원(제주 서귀포)이다. 김 의원은 지난해 5월 면세유를 5년 연장하자는 법안을 먼저 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과의 자유무역협정(FTA)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농어민을 지원한다는 취지도 모두 같다. 이들 법안은 올해 연말 국회에서 병합 심사될 예정인데, 이변이 없다면 자동 연장될 가능성이 높다.
◇ 예탁금도 계속 비과세
농협이나 수협에 예탁금을 넣은 조합원은 이자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는다. 일반 은행에 예금을 넣고 이자를 받으면 15.4%의 소득세를 내야 하지만, 농·수협에 예탁한 농어민이나 조합원은 비과세 혜택을 받는다.
예탁금 비과세 조항은 연간 1조원 가까운 세금이 소요되며, 면세유와 함께 농어민에 대한 지원 성격이 강한 조항으로 꼽힌다. 이 조항도 올해 말까지만 적용되고, 내년에는 5%, 2017년 이후에는 9% 세율로 소득세를 물리기로 했다.
법안을 그대로 두면 내년부터 농어민들은 농·수협에 넣어둔 예탁금에 수천원의 이자소득세를 내야 한다. 국가 입장에선 연간 1조원의 세수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지만, 국회의 분위기는 벌써부터 '연장'으로 쏠리고 있다.
현재까지 농·수협 예탁금 비과세 연장을 추진하는 국회의원은 5명에 달한다. 지난해 10월 새정치민주연합 오제세 의원(청주 흥덕 갑)이 '3년 연장' 법안으로 첫 테이프를 끊은 데 이어 지난 1월 같은 당 이찬열 의원(수원 갑)이 동참했다.
지난 2월과 3월에는 새누리당 나성린 의원(부산진구 갑)과 새정치민주연합 김영록 의원(해남·완도·진도)이 각각 '5년 연장'으로 업그레이드했고, 홍문표 의원은 지난 달 25일 '10년 연장'으로 판을 키웠다.
◇ 중소기업 근로자 우대 계속
중소기업에 다니는 근로자에게 주어지는 세금 혜택도 나란히 연장될 조짐이 보인다. 새정치민주연합 조정식 의원(시흥 을)은 지난 달 중소기업 취업자에 대한 소득세 감면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근로자 1인당 200만원의 세액공제 혜택을 각각 2년간 연장하는 법안을 냈다.
앞서 지난해 11월에는 같은 당 김광진 의원(비례대표)이 중소기업 청년취업자 소득세 감면을 1년 연장하는 법안을 제출했고, 오제세 의원은 지난해 8월 정규직 전환 근로자 세액공제 혜택을 3년 연장하는 법안을 내기도 했다.
이밖에 농협 등 상호금융기관의 예·적금증서에 대한 인지세 면제 조항을 연장하는 법안도 지난해 10월 오제세 의원(3년 연장)에 이어 지난 달 나성린 의원(5년 연장)이 제출했다. 뒤늦게 제출되는 법안일수록 연장 기간이 길어지는 경향도 나타난다.
유사한 세법이 쏟아지는 현상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어차피 국회에서 똑같은 내용을 두고 심사할텐데, 법안 자체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국회 관계자는 "세금 감면을 연장하는 법안은 지역 유권자의 표심을 의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실적을 내기 위해 국회 법제실의 검토도 받지 않고 똑같은 법안을 내는 것은 유권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