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의 민족'이 수수료 개편 선언 열흘 만에 백기투항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이라는 현 상황에 대한 인식 부족과 현장의 고충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는 자기비판을 내놓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여론의 십자포화를 무시하고 수수료 개편안을 강행하기에는 배민도 부담이 컸을 겁니다. 지금의 배민을 있게 한 토양이 바로 점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배민의 빠른 사과와 후속 조치는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배민은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가장 뼈아픈 것은 신뢰를 잃었다는 점입니다. 우선 점주들은 이번 사태로 배민에 대한 배신감이 큽니다. 배민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점주들과의 상생'을 강조해왔습니다. 소상공인 친화적인 이미지를 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로 배민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점주가 아니라 결국 '수익'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또 하나는 소비자들도 배민에 등을 돌렸다는 점입니다. 사실 그동안 소비자들은 배민의 수수료 정책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빠르고 편리하게 원하는 음식을 주문해 받아볼 수 있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소비자들에게 소위 '깃발 꽂기'나 배민이 각 점포 매출의 몇 %를 수수료로 가져가는지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소비자들도 배민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사태가 불거지자 소비자들이 배민앱을 지우고 전화주문에 나섰습니다. SNS를 통해 배민 불매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소비자들도 점주들 못지않게 배민에 대해 큰 배신감을 느꼈던 겁니다. 배민은 처음 론칭 당시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라는 카피를 앞세워 애국심 마케팅을 진행했습니다. 그 덕에 소비자들은 배민을 친근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배민이 연착륙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랬던 배민이 이제는 '배달의 민족'이 아닌 '게르만 민족'이 된 데다, 점주들로부터 과도하게 수수료를 가져간다는 여론이 형성되자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배민도 점주들은 물론 소비자들마저 이탈할 조짐을 보이자 무척 당황했다는 후문입니다. 배민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까지 수수료 개편 후폭풍이 거세지면서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는 분석이 나옵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배민이 불과 서비스 론칭 열흘 만에 수수료 체계 개편 전면 백지화라는 초강수를 둔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배민은 작년 말 독일의 딜리버리 히어로(DH)에 매각키로 했습니다. DH는 국내 배달앱 시장에서 배민에 이어 점유율 2, 3위를 차지하고 있는 요기요와 배달통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DH가 배민을 인수하면 DH의 시장 점유율은 99%에 달합니다. DH의 독무대가 되는 겁니다.
DH가 배민을 최종 인수하려면 최종 절차가 남아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결합 심사입니다. 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DH의 배민 인수는 물거품이 됩니다. 배민과 DH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번 수수료 체계 변경으로 여론의 반발이 거세지자 상황이 묘하게 바뀌었습니다. 배민의 수수료 체계 변경에 정치권까지 나섰고 급기야 배민의 수수료 체계 변경이 핫이슈가 된 겁니다.
DH와 배민의 기업결합 심사를 담당하고 있는 공정위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온 국민의 시선이 배민에 쏠려있는 상황에서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엄청난 비난을 면치 못할 상황에 처했습니다. 급기야 공정위는 "꼼꼼히 살펴보겠다"라는 입장을 내놨습니다. 안 그래도 깐깐한 기업결합 심사를 공정위가 더욱 세밀하게 들여다보겠다고 나섰으니 배민과 DH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겁니다.
배민도 수수료 체계 변경이 이처럼 큰 후폭풍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일각에서는 배민이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인식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옵니다. 업계 등에 따르면 배민은 이번 수수료 체계 개편 전에 DH와 사전 협의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DH 입장에서는 배민을 인수한 만큼 한국 시장에서 수익성을 극대화해야 했고 이 때문에 수수료 체계 개편에 동의했을 겁니다.
하지만 배민과 DH가 놓친 것이 있습니다. 수수료 체계 변경 시기가 공교롭게도 코로나19 확산이라는 비상시국이었다는 점입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국내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배민의 주고객인 소상공인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매출이 급격하게 줄어 가장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점주들에게 배민의 수수료 체계 개편은 엎친 데 덮친 격이 됐습니다.
또 배민과 DH가 국내 배달앱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만큼 수수료 체계 변경 강행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밀어붙이면 된다'라는 과도한 자신감이 화를 자초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배민과 DH가 배달앱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에 오르면서 지나친 자신감을 가졌던 것 같다"면서 "독점적 지위에 대한 비판적 정서를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배민이 근절하려 했던 '깃발 꽂기'도 문제이긴 했습니다. 깃발 꽂기는 자금이 넉넉한 점주들만 혜택을 보는 제도입니다. 배민은 이런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려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문제는 배민의 새 제도가 근시안적이었다는 겁니다. 깃발은 뽑았지만 점주들의 수익성 개선에는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되려 새 제도는 배민의 수익성만 높인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배민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배민은 비교적 빨리 수수료 체계 개편 철회를 선언했습니다. 또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과 김범준 대표가 직접 사과에 나섰습니다. 공정위의 기업결합 심사라는 큰 산을 넘어야 하는 배민과 DH의 입장에서는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이 큰 압박이었을 겁니다. 업계에서는 배민이 수수료 체계 개편 철회라는 초강수를 둔 이면에는 '공정위 눈치 보기'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결과론적이지만 배민의 근시안적인 정책 결정은 무척 아쉬운 대목입니다. 만일 배민이 점주들을 위해 코로나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수수료 면제 등에 나섰다면 어땠을까요? 수수료 체계 개편은 현 사태가 진정된 이후에 진행했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뭇매를 맞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배민에 대한 여론은 물론 공정위 심사에서도 훨씬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유야 어찌 됐건 배민이 자충수를 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인식 없이 섣불리 수수료 체계 개편 카드를 꺼내든 탓입니다. 가장 큰 타격은 공정위 기업결합 심사일 겁니다. 업계에서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브랜드 이미지 실추, 점주와 소비자들의 신뢰 상실 등 잃은 것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그동안 배민이 쌓아왔던 공든 탑이 한 번에 무너진 셈입니다.
배민은 기업입니다. 수익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좀 더 긴 안목으로, 적절한 시기에 수수료 체계 변경을 시행했다면 결과는 더 좋았을 겁니다. 수수료 체계 변경으로 점주들의 수익이 줄어드는 부분에 대해 치밀하게 준비했어야 했습니다. 당장의 이익보다는 함께 오래갈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다면 배민은 아마 더 많은 것을 얻었을 겁니다. 배민의 근시안적인 상황 인식이 아쉬운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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