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광고]는 우리나라 식품유통업계의 광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광고들을 소개하고 그 뒷 이야기들을 펼쳐보는 콘텐츠입니다. 꼴찌 브랜드를 단숨에 1위로 만든 '최고의 광고'부터 잘 나가던 브랜드의 몰락을 불러온 '최악의 광고'까지, '광고의 정석'부터 '광고계의 이단아'까지. 우리의 인상에 남았던 여러 광고 이야기를 나눠 볼 예정입니다. 여러분의 추억의 광고는 뭔가요? 혹시 이 광고 아닌가요.[편집자]
150미터 천연 암반수
"지하 150미터 그 깊은 곳에서부터 온다". 뭐가 오는 걸까. 한 눈에 봐도 맑고 깨끗한 물이 분수처럼 위로 치솟는다. 생수 광고일까. 그런데 이 때도 생수가 있었나. 바위 틈새를 끝없이 솟구치던 물은 이내 흰 거품을 뿜어내는 황금빛 액체로 변한다. 도대체 무슨 광고일까. 다시 한 번 내레이션이 깔리고서야 이 광고의 정체를 알 수 있다. "100% 천연수로 만든 순수한 맥주. 하이트" 맥주 광고다.
하이트진로의 전신인 조선맥주의 대표 브랜드 '크라운맥주'는 만년 2위 맥주였습니다. 시장 점유율 70%를 차지하는 동양맥주(현 오비맥주)의 오비맥주 때문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소비자들은 냉정합니다. 한 번 순위가 굳어지면 이를 뒤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조선맥주가 크라운을 버리고 신제품 '하이트'를 내놓은 이유입니다.
1993년 선보인 하이트맥주의 론칭 광고는 파격적이었습니다. 술이 아닌 '물'을 앞세운 겁니다. 깨끗한 물로 만들어서 그만큼 깨끗한 맛을 낸다는 이야기에 집중했습니다. 30초짜리 광고에서 맥주가 등장하는 건 마지막 3초 남짓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90%의 시간은 오로지 '물'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습니다.
150미터 지하에서 끌어온다는 천연암반수는 직관적으로 '깨끗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제품명인 '하이트(hite)' 역시 150미터 지하에서 물을 끌어올린다는 의미를 담은 단어 'height(높이)'에서 착안했죠.
후속 광고 역시 '물맛'에 집중했습니다. 이듬해인 1994년엔 "맥주의 90%는 물"이라는 콘셉트로 광고를 진행했고요. 여기서는 "맥주의 90%가 물로 이뤄져 있는데, 물 맛이 좋아야 맥주 맛도 좋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1996년엔 아예 '물사랑' 캠페인을 펼치며 '하이트=깨끗한 물'이라는 공식을 확립시켰습니다. 국내 맥주 시장의 판도를 바꾼 '천연 암반수' 광고 시리즈입니다.
물맛 전쟁
왜 조선맥주는 뜬금없이 '물 광고'를 만들었을까요. 시계를 2년 전으로 돌려 봅니다. 하이트 출시 2년 전인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 터졌습니다. 경상북도 구미공업단지 내 두산전자에서 페놀이 유출돼 대구시 상수원으로 유입된 사건입니다.
1991년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은 마시는 물에 대한 인식을 바꿔놨습니다. 수돗물을 그냥 마시던 사람들이 보리차를 끓이기 시작했고 정수기 사업도 대호황을 이뤘습니다. 이전까지 불법이었던 생수 판매도 이 사건을 계기로 1994년 합법화됐습니다.
'물이 90%'인 맥주 역시 영향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당시 맥주 시장 1위 브랜드였던 오비맥주는 두산그룹 계열사였죠. 두산그룹 전체에 대한 불매운동이 펼쳐지는 와중에 오비맥주라고 불똥이 튀지 않을 리 없었죠. 이런 상황에서 조선맥주가 '깨끗한 천연 암반수'를 강조한 신제품을 출시했습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습니다. 이듬해엔 진로쿠어스도 지하 200m에서 끌어올린 물로 만든 맥주 '카스'를 내놨습니다.
조선맥주는 하이트 출시 이후 맹공을 이어갔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공격적인 마케팅을 단행했습니다. 1994년엔 '좋은 물로 만든다고 말할 수 없는 맥주가 있습니다', '왜 다른 맥주들이 물 이야기만 나오면 모두 꿀먹은 벙어리인지 아십니까', '물에 대해 말을 못 하는 맥주가 과연 좋은 맥주일까요'라며 오비맥주를 저격했다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광고 중지 명령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는 확실했습니다. 출시 첫 해 점유율을 5%까지 끌어올리더니 3년 만인 1996년, 오비맥주를 누르고 맥주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하이트 맥주의 성공이 어느 정도였냐면, 1998년엔 아예 사명을 '하이트맥주'로 바꿀 정도였습니다. 하이트 맥주의 성공은 '반짝'이 아니었습니다. 격차를 점점 더 벌려나가더니 2000년대 초엔 점유율을 60% 이상으로 끌어올리며 오비맥주와의 지겨웠던 우열 관계를 완전히 뒤집는 데 성공했습니다. '물 맛'으로 이뤄낸 성공기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뒷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하이트 맥주는 17년간 1위를 지킨 끝에 오비맥주의 '카스'에 1위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권불십년'이라 하는데 17년을 지켜냈으니 할 만큼은 했다고 봐도 될 겁니다. 그 후 하이트진로는 테라와 켈리로 다시 한 번 '하이트의 기적'을 꿈꿨지만 이번엔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건, 하이트를 계승하는 브랜드인 테라와 켈리, '200m 지하수'를 강조했던 카스 모두 현재는 지하 암반수 대신 '정제수'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새 정제 기술이 크게 발전하면서 불순물 등을 제거해야 하는 지하수에 비해 관리가 쉽고 맛을 균일하게 유지할 수 있는 정제수의 장점이 부각된 거죠. 맥주 시장의 판도를 뒤바꾼 '물 맛' 전쟁은 그렇게 역사 속 이야기가 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