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결국 '참고 견디는' 전략을 택했다. 모두 다 살리는 구조조정을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같은 구조적인 침체에 빠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진 상황에서 이같은 구조조정의 성공 가능성을 낙관하기 어려워졌다. 금융권이나 산업계 양 쪽 모두 채권단 중심의 재무 구조조정 틀에 한계를 제기하면서 사업 재편과 산업 구조조정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해 이후 손 놓고 있다가 오는 3분기에나 산업경쟁력 강화 방안을 발표한다고 했지만 얼마나 과감하고 효과적인 방안을 내놓을지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 참고 견디는 전략만으론 어렵다
정부가 지난 8일 발표한 기업 구조조정 방안은 기존 자구안을 강화하는 내용이 뼈대를 이뤘다. 생산 설비 및 인력감축 등의 뼈를 깎는 자구노력으로 참고 견디다보면 경기가 좋아지고, 기업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전망이 깔려 있다.
대부분의 정부 당국자의 인식도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크게 다르지 않다. 금융당국 한 고위관계자는 "유가가 살아나야 한다"며 "유가가 오르면 해양플랜트도 다시 힘을 받고, 우리 기업도 다시 괜찮아지지 않겠냐"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다.
통상적인 경기 사이클이라면 틀린 생각도, 틀린 전략도 아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구조적인 침체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에선 기존의 구조조정 방식으론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지난달 금융연구원 주최 세미나에서 오승욱 보스톤컨설팅그룹(BCG) 파트너도 "시장이 반전되면 성과가 개선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며 '성수기의 실종'을 경고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어제(9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전격인하한 이후 "현재 한국의 저성장은 구조적인 요인이 많이 작용하고 있는 만큼 통화정책, 재정정책과 구조개혁이 함께 가야 한다"고 언급한 것 역시 이같은 경제상황을 반영한다.
◇ 일본의 잘못된 구조조정 전철 밟나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통상적인 경기순환과 달리 경제와 산업환경의 구조와 트렌드가 변하면 참고 견디는 원가 절감 노력만으론 부족하다"며 "이렇게해서 모든 기업이 살아남기도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도 "일본 정부와 기업은 버블 붕괴 초기 일본경제 성장률이 3.4%에 달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며 "92년에 0%대로 떨어진 시점에서도 이를 통상적인 경기순환으로 간주해 악화된 재무구조 개선에 주력하는 전략을 고수했다"고 언급했다.
일본이 장기불황 초기에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해 구조조정을 과감하게 추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원가절감, 경비 삭감 등 통상적인 불황대책에 치중해 근본적인 혁신을 하지 못했다. 사업의 철수나 매각도 경제적 가치가 남아 있는 초기에 추진했어야 하지만 이 역시 늦어지면서 악순환을 겪어야 했다고 경고했다.
이같은 일본의 초기 구조조정 실패를 우리나라가 답습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 '자칫 다 죽는다' 경고음 곳곳서 나오지만
실제 일본이 2000년 초반까지 산업 구조조정을 미루면서 이들을 지원했던 대형은행엔 부실채권이 쌓이고 결국 은행 자체 부실로 확대됐다. 이는 시중은행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는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을 중심으로 부실채권이 폭증, 급기야 자본확충펀드와 정부 출자 등 총 12조원이 이들 은행에 투입된다. 농협은행도 빅배스까지 거론되는 절체정명의 위기에 처했고, 조선·해운 등의 익스포져(위험노출액)를 고려하면 이같은 부실이 시중은행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진웅섭 금융감독원장은 어제 산업은행 수출입은행과, 국민은행, 신한은행 등 8곳의 은행장을 소집해 기업 구조조정 방향을 설명하면서 "조선업을 둘러싼 시장 불안심리가 완화될 수 있도록 협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신용경색 등을 우려한 조치이지만 구조조정 실패 땐 이 역시 은행의 부실 폭탄으로 돌아온다.
일본이 구조조정에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 신성장 분야에 주력하지 못했듯 재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차원에서 경제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 산업재편 정부는 '묵묵부답'
결국 답은 재무개선에 치중하면서 참고 견디는 게 아니라 산업재편과 새로운 성장산업 발굴에 있다. 구정한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구조조정 대상 산업에서의 과잉공급, 중국의 기술경쟁력 상승 등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주력산업인 이들 산업이 구조조정 이후에도 충분한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왔다. 지난해부터 이같은 요구가 빗발쳤지만, 여전히 채권단 중심의 구조조정만을 강조하면서 손조차 대지 않았다. 조선·해운을 제외한 다른 경기민감업종에 대해선 오히려 "괜찮다"는 얘기만 되풀이했다.
이제서야 겨우 오는 3분기에 조선·해운·철강·유화 등 산업경쟁력 유지 및 제고방안을 발표하기로 했다. 그동안의 정부의 안일한 상황인식을 생각하면 과감하고 혁신적인 방안이 나올지 여부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적인 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