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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의 보험 인사이트]매출이 우선이니 설계는 대신해드립니다?

  • 2020.05.18(월) 09:30

4차 산업혁명기 대학 강의실에서는 출석을 부르지 않는다. 과거처럼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강의장에 들어가서 어플리케이션 등을 통해 자동으로 출석 확인이 된다. 청춘사업을 위해 누군가에게 대리출석을 부탁하던 낭만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기술발전 속에서 대리자를 이용하는 행위는 더욱 고도화되고 확산된다. 대리운전, 심부름 및 하객 대행 등 다양한 대리자가 등장하고 스마트폰으로 누군가를 대신할 사람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대리운전기사라는 직업은 음주 등으로 운전이 불가능한 사람을 대신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처럼 많은 직업명이 그 직업이 하는 일을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FP, FC, RC, LC, PA 등 각 보험사마다 영문 축약형으로 불리는 직업의 표준 명칭은 보험 설계사다. 이들은 보험상품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설계사가 설계를 제대로 못한다. 마치 대리운전기사가 면허증은 있으나 운전을 못하는 격이다. 손해보험, 생명보험, 제3보험을 취급할 수 있는 설계사 자격은 보유했지만, 설계를 못하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보험상품은 계리사가 위험률에 근거한 보험료를 산출하여 만들지만 그 자체로 완성품이 아니다. 많게는 100개가 넘는 특별약관 중 피보험자나 피보험목적에게 필요한 보장을 선택하고, 납입기간 등을 정하는 설계과정을 거쳐야 계약 체결이 가능하다. 계리사가 보험상품을 만들어도 설계과정이 없으면 쓸모가 없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보험 설계사다. 그런데 제대로 설계를 못하는 자가 많다. 더 이상한 것은 매달 각 보험사마다 설계사를 통한 신계약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보험상품을 완성시키는 사람이 일을 하지 않는데, 계약이 체결되니 신기함을 넘어 공포스럽다.

살펴본 기이함이 가능한 이유는 보험상품 설계를 대신해주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보통 설계 매니저 등으로 불린다. 주로 교차영업을 지원하는 곳이나 대면채널인 지점 등에서 자주 목격된다. 본래 취지는 교차나 신인 설계사에게 낯선 상품에 대한 설계 가이드나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모습은 자연스럽게 설계를 대신해주는 사람으로 변질 되었다.

설계사가 설계를 하지 못하거나 타인에게 대리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계약자가 보험료를 납입하는 이유는 사고 발생 시 보험금을 수령하여 사고를 처리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보험금 지급에 문제가 발생하면 보험료를 납입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대리설계 된 계약은 보험금 지급에 있어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계약 전, 후 알릴의무를 위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화재보험은 피보험목적인 건물 내부 및 외부에서 발생하는 화재를 포함한 다양한 사고를 보장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동일한 건물은 없다. 쌍둥이빌딩이라도 각기 점유한 업종에 따른 위험률이 다르다. 따라서 화재보험을 올바르게 설계하기 위해서는 실제 건물에 방문하여 피보험목적이 가진 위험과 특이사항을 제대로 확인하고 이를 반영해야 한다. 하지만 대리설계자는 실제로 건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계약 전 알릴의무를 위반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계약은 유지되어도 보험금 지급에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화재보험은 계약 후에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건물을 둘러싼 위험률이 지속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계약자가 보험기간 내 동일 업종을 유지하더라도 다른 층의 업종이 변경되면 위험률을 변경해야 한다. 또한 리모델링이나 집기비품의 교체 등은 변경설계를 통해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 아무런 변화가 없더라도 건물과 내부 시설 및 집기비품 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가상각이 되기 때문에 재평가하여 가입금액을 조정해야 한다. 대리설계 된 계약 대부분은 보험금 지급과 관련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에도 계약 후 알릴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위험하고 상식 밖의 대리설계가 이뤄지는 배경에는 매출에 대한 잘못된 집착이 존재한다. 계약만 체결하고 보험료만 받으면 끝이라는 생각은 보험 본연의 목적에서 벗어난다. 보험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으면 결국 보험산업은 소비자 신뢰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교차영업 등을 허용했다면, 감독기관은 해당 제도에 대한 철저한 관리감독을 통해 부실을 예방해야 한다. 하지만 잘못된 설계사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는 보험사의 관행을 방치하고 있다.

교차영업뿐만 아니라 설계과정에서 대리자 문제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피보험자의 정보만을 넘기면 설계를 대신해주는 존재는 보험대리점(GA)에서는 흔히 찾을 수 있다. 또한 전속 채널에서도 영업 관리자가 표준설계안을 공유하는 등 동일한 설계 값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한다. 이는 피보험목적의 상황과 위험이 다름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문제를 확대한다.

보험을 포함한 금융 산업의 핵심은 신뢰다. 보험중개 수수료가 상대적으로 높은 이유는 설계라는 과정을 통해 상품 제작의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든 상품에 책임을 지는 것인데, 이를 대리하는 것은 소비자 기만이자 보험산업 전체의 신뢰를 파괴하는 행위다. 물론 매출이 많아지면 단기간에는 좋다. 하지만 보험 상품은 타 금융과 비교 호흡이 길다. 단기 성과보다는 건전한 계약이 지속되어 장기적으로 매출이 유지되는 것이 보험사와 설계사 모두에게 이롭다.

보험산업의 장기 성장 및 유지는 소비자 신뢰가 반드시 필요하다. 보험산업에 대한 깊고 오래된 불신을 해소하는 가장 빠른 길은 올바른 설계에 있다. 사고 후 보험금이 지급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피보험목적에 맞게 제대로 진행된 설계다. 이를 대리자에게 맡기는 것은 설계사가 본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며, 이를 조장하는 보험사는 미래 성장동력을 잃는 것이다. 또한 설계 과정의 대리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방치하는 감독기관은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피해는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보험중개 과정에서 각자 맡은 바를 대리하지 않고 책임지는 것이 보험산업의 미래를 밝히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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