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9개월을 남겨두고 고승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과 정은보 한미 방위비분담 협상 대사를 금융당국 수장에 동시에 올렸다.
두 인물 모두 정통 금융관료 출신으로, 행정고시 28회 동기다. 양대 금융수장이 다시 '모피아'(마피아+재무관료) 출신으로 채워진 셈이다.
정권 내내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엇박자를 내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임기 말년엔 '안정'에 방점을 찍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5일 금융위원장에 고승범 한은 금통위원을 지명했다. 같은 날 금융위는 신임 금감원장에 정 협상 대사를 내정했다. 금감원장은 금융위가 의결해 금융위원장이 이를 제청하면 대통령이 임명한다. 3개월 간 공석이었던 금감원장 인사는 예견됐지만 금융위원장까지 교체된 건 금융권 안팎에서도 예상치 못한 깜짝 인사다. 약 2년의 임기를 채운 은성수 위원장이 최근 사의를 표명했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1962년생인 고 내정자는 금융위에서 금융서비스국장, 금융정책국장, 사무처장,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2003년 신용카드 사태, 2011년 저축은행 사태 등 굵직한 금융현안들을 직접 관리한 경험이 있다. 2016년 한은 금통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 지난해 4년 임기의 금통위원에 연임됐다. 한은법이 개정된 1998년 이후 첫 연임 사례였다.
정 내정자는 1961년생으로 금융위 사무처장, 기획재정부 차관보, 금융위 부위원장 등 주요 보직을 거쳤다. 고 내정자 못지않은 금융전문가라는 평가가 나온다. 당초 청와대는 금감원장 자리를 공석으로 두면서 민간출신 학자를 물색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돌고 돌아 결국 관료출신인 정 내정자가 낙점됐다.
금융위와의 관계회복과 금감원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 청와대가 관료 카드를 꺼냈다는 게 금융권의 대체적인 평가다. 임종룡 전 위원장과 진웅섭 전 금감원장처럼 '혼연일체'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관료 출신인 최종구 전 위원장, 은성수 전 위원장과 민간출신인 윤석헌 전 금감원장이 금융감독체계 개편, 인사권을 두고 번번이 충돌하면서 금융권의 피로도가 적잖게 누적된 상황이었다. 여기에 이론에만 충실한 민간출신 금감원장에 대한 금감원 노조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가상화폐 규제, 가계부채 관리 등 주요 현안에서 두 기관이 한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높아졌다. 자연스럽게 금융위와 금감원의 갈등 양상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전망이다. 본격적인 대선정국을 앞두고 적어도 두 기관 수장의 불협화음이 국정 운영의 부담으로 작용할 확률은 낮아진 것이다.
고 내정자는 "코로나19 위기 극복과 경제회복에 매진하면서 국정과제와 금융정책과제들을 차질 없이 이행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소임"이라고 취임 소감을 전했다. 그는 "가계부채, 자산가격 변동 등 경제·금융 위험요인을 철저히 관리하면서 대내외 불확실성에 대비해 나가겠다"고도 했다.
이어 "한국판 뉴딜 추진, 금융산업 혁신과 디지털화 등 미래 먹거리 발굴을 통해 선도형 경제·금융으로의 전환을 적극 뒷받침 해 나가겠다"면서 "국회, 기재부 등 정부부처, 한은, 금감원 등과도 더욱 긴밀하게 소통·협력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정 내정자는 "그동안 경험을 바탕으로 관계기관과 협력하며 리스크 요인들을 관리해 나가겠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법과 원칙에 기반한 금융감독', '선제적 지도를 비롯한 사전적 감독', '금융소비자 보호' 등 측면에서 추구해야 할 방향성을 재정립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