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완만하게 하락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가계부채 누증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 비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해 왔다."
한국은행이 국내 가계부채의 증가세가 세계 주요국의 흐름과는 도드라지게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최근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이 낸 '장기구조적 관점에서 본 가계부채 증가의 원인과 영향 및 연착륙 방안'이란 보고서를 통해서죠.
2010년 주요 43개국 중 14번째로 높은 수준을 보였던 우리나라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최근 3위(지난해 말 기준 105%)까지 치솟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왜 다른 나라들과 거꾸로인 행보를 보인 것일까요? 몇 가지 특징들을 살펴 봤습니다.
①많이 버는 집이 빚 많다
보고서를 보면 국내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00년대 이전까지 주요국에 비해서 낮은 수준을 보였죠. 하지만 2002~20303년 '신용카드 사태', 2014~2017년 '가계대출 규제 완화', 2020~2021년 '코로나19' 등을 거치면서 크게 높아졌습니다.
한국은행은 이런 국내 가계부채의 주요 특징을 크게 두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바로 '고소득 차주·가구 중심의 대출'과 '높은 만기일시상환 및 차환 비중'이죠.
우선 고소득 차주 중심 대출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소득분위 1~5분위(하위 50%)의 경우 해당 분위에 속하는 인구의 30% 미만이 대출을 보유했는데요. 소득수준이 가장 높은 10분위(상위 10%)의 경우 해당 분위의 신용 활동 인구 약 75%가 대출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죠.
이는 소득수준에 따라 대출 접근성이나 규모에 있어 상당한 격차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한국은행은 소득 수준에 따라 대출 접근성에 격차가 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1~5분위로 나눈 가구 단위로 국내 소득 5분위(상위 20%)가 전체 대출잔액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약 43%였는데요.
이는 캐나다(30.5%), 뉴질랜드 (25.0%) 등 일부 주요 선진국에 비해서는 높은 편이긴 해요. 하지만 미국의 소득 상위 10% 가구 대출 잔액 점유율은 35%로, 우리나라 상위 10%(27%)보다 훨씬 높죠.
보고서는 또 높은 만기 일시상환대출 및 차환 비중을 국내 가계대출의 특징으로 꼽았는데요. 우리나라는 가계대출 중 전세·신용·중도금 대출의 대부분이 만기일시상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라고 해요. 정책당국이 지속적으로 분할 상환을 유도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는 거죠. 만기일시상환 방식 대출은 지난해 말 전체 가계대출의 53.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용대출의 경우 분할상환 비중이 전체의 15%에 불과합니다. 일시상환 비중이 높은 신용대출은 가계가 부채를 서서히 해소해 나가기보다는 만기 때 재연장을 택하기 일쑤죠.
②은행은 돈벌기 쉬운 가계대출
한국은행은 국내 가계부채 증가 원인으로 △가계대출의 높은 수익성 및 안정성 △차주 단위 대출 규제 미비 △저금리 기조 장기화 등에 따른 자산 투자 및 전세 수요 등 3가지를 꼽았습니다.
가계대출의 높은 수익성 및 안정성이란 무슨 얘길까요? 은행들이 위험을 덜 감수하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가계대출이었단 얘깁니다.
금융기관에서 가계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 대출 비중을 넘어서고 있는데요. 한국은행은 금융기관이 안정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가계대출을 기업대출보다 선호할 유인이 형성됐다고 분석했습니다.
국내은행의 수익구조를 살펴보면 이자이익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편인데요. 가계대출이 기업대출보다 연체율이 낮아 수익성이 높죠. 그래서 가계대출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아울러 은행 리스크 관리를 위해 설계된 바젤규제도 은행이 가계대출 취급을 선호할 유인을 제공했습니다. 바젤Ⅱ 규제에서 기업 대출에 대한 위험가중치는 20~150%(2019년 평균 70%대)에 달합니다. 하지만 주거용 주택담보대출의 위험가중치는 35~50%(2019년 기준 주담대는 10%대)로 낮죠.
한국은행이 두 번째로 꼽은 원인은 차주 단위 대출 규제가 늦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는 주요국에 비교하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의 도입이 늦었죠. 게다가 대출 시점과 종류에 따라 상당수의 대출이 DSR 규제를 적용받지 않고요.
예를 들어 지난해 7월부터 총대출액 1억원을 초과하는 차주들은 DSR을 적용받도록 대상 범위가 확대됐는데, 기존 대출의 만기 연장 시에는 DSR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시점과 종류에 따라 다른 DSR 규제가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원인은 저금리 기조 장기화 등에 따른 자산 투자 및 전세 수요입니다. 저금리 기조 장기화로 가계의 차입비용 및 안전자산 실질수익률이 크게 하락해 가계가 다른 자산으로의 투자를 확대할 유인이 형성되었다는 것이죠.
한국의 경우 전세대출이라는 특수한 요소도 존재합니다. 전세 보증금은 보통 집값의 50~80% 수준이죠. 해외에서의 월세 보증금이 통상 3~6개월치 임대료인 것과는 차이가 큽니다. 전세보증금을 은행이 대출로 내주고 있으니 가계부채를 늘리는 요인이 되는 거죠.
특히 2016년 이후 전세대출은 연평균 약 20~30% 증가했습니다. 그러면서 전세대출이 가계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16년 5%에서 지난해 9월 14%까지 확대됐죠.
전세대출이 크게 늘어난 원인은 2017년 8월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이 40%로 하향 조정되는 등 규제가 강화된 반면, 전세대출에 대해서는 다주택자 및 고가주택 거주자를 제외하고는 완화적인 규제가 지속됐기 때문입니다.
다만 보고서 작성자는 전체 가계대출이 증가한 탓을 전세대출로만 돌리지는 않고 있습니다. 강환구 실장은 "전세자금 대출이 국내 가계대출 비중에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크지는 않다"며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3위까지 올라선 것은 주택담보대출·전세대출·신용대출의 증가가 복합적으로 장기간 누적된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③과연, 줄일 수는 있을까?
한국은행은 국내 높은 수준의 가계부채가 당장 금융 불안정으로 이어질 위험은 제한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담보에 따른 대출액 비율(LTV)이 낮고 대출잔액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소득 차주의 상환능력도 양호하다는 점에서죠. 자산 가격 하락, 금리상승 같은 불안 요인이 금융시스템 전반의 건전성 악화로 확산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다만 한국은행은 늘어난 가계부채가 우리 경제의 장기성장세를 가로막고, 자산 불평등을 확대하는 등의 '부정적인 외부효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가계부채 확대는 현재 소비를 증가시킴으로써 단기적으로 경제를 부양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계부채가 임계치를 넘어서 과도하게 늘어날 경우 '원리금 상환 부담에 따른 소비위축 효과'가 '부채 확대에 따른 소비진작효과'보다 커질 수 있다는 겁니다. 경제 장기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죠.
또 소득수준에 따른 대출 접근성 격차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가계의 유동성이 자산시장으로 유입될 경우 높은 고소득층의 자산이 저소득층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할 수 있습니다. 고소득층만 '레버리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거죠. 자산 불평등이 확대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얘깁니다.
따라서 한국은행은 앞으로 거시건전성 정책 및 통화정책 조합을 통해 가계부문의 '디레버리징'을 점진적으로 달성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또 가계부채 규모가 경제성장과 금융안정을 저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경제 및 금융 발전 속도에 맞추어 변동할 수 있도록 종합적인 정책체계 수립이 필요하고 조언했습니다.
한국은행은 "가계 빚을 줄이면서 연착륙에 성공하려면 DSR 예외 대상을 축소하는 것을 비롯해 LTV 수준별 차등 금리 및 만기일시상환 대출 가산 금리 적용 등의 조치를 검토해야 한다"며 "정책 대응 과정에서 애로를 겪을 가능성이 높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는 초장기 정책 주택담보대출 과 소액 대출상품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