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업 발굴부터 업무 효율화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AI)이 바이오 스타트업 사업 환경 곳곳에서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실제로 지난달 29일 서울 동대문구 서울바이오허브에서 만난 스타트업들은 AI 기술을 접목한 제품·서비스 개발은 물론 경영 전반에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바이오 스타트업들은 AI를 투자 매력을 높이기 위한 도구로도 활용하고 있다. 제품 및 서비스 고도화를 위한 데이터 확보 역량과 실질적인 사업화 능력, 수익화 가능성에 AI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가 투자자들에게 좋은 점수를 딸 수 있는 포인트라는 것이다. 한때는 AI 기술력이나 알고리즘 보유 여부만으로 투자 유치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전언이다.
비즈워치는 서울바이오허브에 입주한 4개의 AI·바이오 융합 스타트업의 대표를 만나 이들의 사업 전략을 알아봤다. 각각 병리판독 AI 솔루션을 개발한 김용환 슈파스 대표, AI 심리 상담 키오스크를 개발한 윤현지 넥스브이 대표, 가상 오믹스 데이터를 생성하는 AI 모델을 만들고 있는 김태형 실리코팜 대표, AI 기반 아이웨어를 개발하는 김민규 오큘러스 대표다.
슈파스, 수시간 걸리는 암세포 판독 'AI로 수초만에 OK'

슈파스는 유방암을 AI로 진단하는 보조 솔루션 'InnisVue'를 주력으로 하는 스타트업이다. 이 회사는 사람이 하던 암세포 판독을 AI로 대체했다. 이 같은 판독 작업은 반복적이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것으로 사람이 직접 수행하면 인건비를 제대로 건지기 어렵다.
슈파스가 파고든 것은 AI가 잘 할 수 있는 일로 비효율을 해결하는 것이다. 슈파스는 병리 판독 과정에 AI를 적용해 사업화했다. 과거 유방암 조직 슬라이드 하나를 판독하려면 의사가 수십만 개의 세포를 일일이 계수해야 했다. 최대 3~4시간이 걸리는 고강도 작업이다.
슈파스의 유방암 AI 진단 보조 솔루션 'InnisVue'는 세포 계수와 암세포 비율 정량화를 수 초에서 수 분 내에 처리한다. 과거 암 진행 정도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의사가 모든 암세포를 계수하거나, 조직 슬라이드를 보고 직관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도입하면서 정량적이고 객관적인 데이터에 기반해 암의 진행정도를 판단할 수 있게 됐다.
사업 기회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열렸다. 슈파스는 2023년 AI 기반 패혈증 예측·진단 소프트웨어로 미국 FDA 승인을 획득했다. 승인까지 약 2년이 걸렸고, 방대한 규제 문서 작업이 수반됐다. 슈파스는 이 과정에서 쌓은 규제 대응 역량을 바탕으로 규제 문서를 자동 검토·보완하는 AI 솔루션을 별도로 개발했다. 이같은 인공지능을 활용 경험은 규제 대응 인공지능 솔루션에 관심을 가진 보톨리눔톡신 기업 제테마의 협업으로도 이어졌다.
김 대표는 "AI는 반복 업무를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사업 영역 자체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회사는 유방암에서 출발해 다른 암종으로 판독 범위를 점차 넓혀갈 계획이다.넥스브이, AI로 생산성 끌어올려

스타트업 현장에서 인공지능은 새로운 사업 기회가 되는 것은 물론 스타트업의 일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스타트업은 운영 자금이 풍족하지 못해 조직 크기를 적정하게 유지하고, 핵심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업이 커질수록 일손은 부족해지고 대응해야 할 경영·마케팅 업무도 늘어나지만, 자금은 항상 모자라다.
넥스브이는 이 문제를 AI로 풀었다. 문서 작성, 고객 응대, 초기 코드 생성 등 반복 업무를 AI로 처리하면서 생산성을 끌어올렸다. 현재 전체 임직원 24명 가운데 절반이 개발 인력이고, 경영지원 인력은 2명에 불과하다. AI가 지원 부서의 확장을 막아 개발자 중심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윤현지 넥스브이 대표는 "AI가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대체하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하는 방식으로 일하면서 효율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핵심 조직인 개발 직군의 효율성도 AI로 더욱 높아졌다. "개발자들은 AI 도입 이후 3명의 보조 개발자를 둔 것처럼 느낀다고 한다"면서 "실제 6~7개월이 소요되던 솔루션 개발 기간을 1~2개월로 단축했다"고 말했다.
넥스브이는 AI 기반 멘탈케어 솔루션을 개발하는 기업이다. 주력 제품인 심리 상담 키오스크 '위로미'는 공공기관, 학교, 청소년센터 등에 보급되고 있다. 개방된 공간에서 키오스크를 통해 심리 상담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사적 공간에 대한 부담 없이 상담에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사용자와의 대화를 통해 심리 상태를 객관적인 수치로 제공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넥스브이는 B2G 시장에 뛰어든 경험에 바탕해 B2B, B2C 시장까지 확장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공공 인프라에 제품을 공급해 기술력을 검증하고, 사용 데이터를 확보해 기술을 고도화 나간다는 방침이다.
실리코팜, '가상 데이터' 승부…데이터 경쟁 선점

AI 확산이 기술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진 기업도 있었다. 김태형 실리코팜 공동대표는 AX전환 흐름을 피부로 체감한 인물이다.
그는 유전자 발현, 단백질 변화, 약물 반응 등 생체 내 변화를 수치화한 오믹스 데이터를 가상으로 생성하는 바이오 전용 AI 파운데이션 모델 'KnockG'를 개발하고 있다. 통상 실험실에서 직접 확보하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한 오믹스 데이터를 AI로 생성해 신약 개발 초기 단계의 연구 효율을 높이는 것이 목표다.
2020년 실리코팜이 창업하던 당시만 해도 바이오 업계에서 AI가 생성한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컸다. 하지만 생성형 AI가 빠르게 상용화되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투자자들과 산업계 전반의 AI 기술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가상 데이터를 실제 연구와 산업 현장에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늘어나고 있다.
규제 환경의 변화도 AI 데이터 생성 기술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미국 FDA는 동물실험을 점진적으로 폐지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EU 역시 유럽의회를 중심으로 동물실험 폐지 로드맵을 제안하며 대체 기반 규제 체계로의 전환을 추진 중이다.
실리코팜은 2025년 하반기부터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인 오라클과의 협력도 진행하고 있다. 오라클 클라우드 내에 실리코팜의 서비스를 공급하고, 해외 파트너십 기회를 제공하는 형태다.
김 대표는 "지금은 실제 고객 수요와 사업화 가능성을 함께 증명해야 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며 "국내외 협업을 통해 실제 고객사들이 원하는 솔루션을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큘러스, 구독경제로 사업성 검증

투자 기준 역시 변화하고 있다. 서울바이오허브에서 만난 스타트업 대표들은 "이제는 AI 자체에 환호하던 단계를 지나, 실제 사업성과 수익 가능성을 냉정하게 검증하는 국면에 들어섰다"고 입을 모았다.
이 같은 변화에 맞춰 일부 스타트업들은 초기부터 매출이 가능한 사업모델을 먼저 구축한 뒤, 여기에 AI 기능을 접목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꾸고 있다. 오큘러스 역시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사례다.
오큘러스는 안경 구독 서비스 '아이러뷰'와 초점조절 안경을 중심으로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아이러뷰는 제휴 안경원에서 시력검사를 받은 뒤 렌즈를 포함한 안경을 월 구독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다. 회사는 초기부터 안정적인 매출을 확보하며 시장성을 검증했다고 설명했다.
초점조절 안경은 노안 사용자가 거리별로 여러 개의 돋보기를 번갈아 사용해야 하는 불편을 줄이기 위한 제품이다. 버튼 조작만으로 렌즈 초점을 자동 조절할 수 있어 근거리와 원거리 등 다양한 환경에 대응할 수 있다.
회사는 여기에 AI 기능까지 접목하고 있다. 안경에 내장된 센서를 통해 동공 움직임을 감지하고, 이를 분석해 안질환이나 뇌졸중 위험 신호를 조기에 포착한다는 구상이다. 이상 징후가 감지되면 보호자나 의료기관에 알림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회사는 이를 'AI 시각지능' 기술로 정의하고 있다.
김민규 오큘러스 대표는 "투자자들은 이제 AI라는 단어 자체보다 실제 매출과 데이터, 상용화 경험을 더 중요하게 평가한다"며 "오큘러스는 빠른 상용화와 가격 경쟁력을 기반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이를 통해 AI 고도화를 위한 자금도 확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