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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한진, '이노무 집안'

  • 2018.04.16(월) 15:21

"이노무(이 놈의) 집안도 참…" 지난 12일 오후께 한 선배로부터 받은 메시지였다. 링크된 인터넷 주소를 따라 들어가보니 "대한항공 조현민, 광고대행사 직원에 물 뿌려"라는 제목이 달린 기사였다. "아이고 이건 또 뭐래요" 이렇게 답신을 날린 게 전부였다.

 

담당 데스크에게도 간단히 보고만 하고 넘겼다. 개가 사람을 물으면 기사가 아니다, 사람이 개를 물어야 기사다. 그렇게 배워서다. '이 놈의 집안'에서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아니 이런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달랐을 거에요. 그런데 '해도해도 너무 하다'는 식으로 얘기가 커졌지 뭐에요. 여태 이 사건을 두고 기사 한 줄 안 쓴 항공업계, 한진그룹 담당 기자가 늘어놓는 군색한 변명이다. 

 

이쯤 되면 '가풍(家風)'이다. 가풍은 '한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생활 관습. 그 집안의 특유한 분위기로서 감지되며, 생활양식이나 생활태도로서 나타난다'라고 두산백과에 쓰여있다. 이 집안에 이런 일은 한두번이 아니다. 언니, 오빠, 아빠 등등 일가가 신문 지상에 오르내린 것만도 그렇다. 세간에 공식화되지 않은 일까지 세어 보려면 두 손이 모자라다.

 

▲ 조현민 전무가 2014년 자신이 쓴 '지니의 콩닥콩닥 세계여행' 책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 대한항공)

 

"그 중에서도 어마어마한…" 영화 '도둑들'에서 '예니콜'로 분한 배우 전지현의 대사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였다. 정말 정신을 잃기 직전쯤까지 술을 먹었을 때쯤 이 집안 직원 입에서 나온 말이다. "언니에 비하면 성격도 밝아뵈고, 스타일도 전지현 닮아서 직원들이 대하기는 낫지 않냐"고 했을 때, 대답하는 그 직원 눈에 비친 울분 비슷한 것을, 역시 만취 직전이었던 기자는 기억한다.

 

술김이어서 그랬는지, 전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회사 오너 일가 상사를 향한 말이어서 그랬는지 영화 속 전지현보다 훨씬 '찰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직원 입도 이내 틀어막혔다. 옆자리 후배 직원은 그냥 영화에 나온 얘기라고, 웃자고 한 얘기일 뿐이라고 했다. '땅콩 회항'이 이제 좀 잠잠해졌을 2년 전께였을 꺼다.

 

"업무에 대한 열정에 집중하다 보니…" 란다. 논란에 오른 조 전무가 지난 15일 밤 뒤늦게 직원들에게 보낸 사과문이다. 비문이 거슬리는 건 차치하고 '열정'을 운운하는 데서 속이 거북해진다. 이 시대에 '열정'은 '열정 페이'에 청춘을 저당잡힌 젊은 '을(乙)'들의 언어다. 그걸 가져다 포장한 게 가증스럽다.

 

'83년생 조현민'의 삶은 동년배 '82년생 김지영'들의 인생과 얼마나 다를까. 아니 같은 구석이 있기나 할까. 오너의 딸이란 이유로 20대에 굴지 대기업 임원에 올라 아버지 뻘 부하 직원들에게 어마어마한 욕을 날릴 수 있는 게 그다. '갑(甲) 중의 갑'인 조 전무가 '열정'이란 단어를 사과문에 넣도록 아이디어를 준 이는 또 어떤 '을'일까.

 

"정말 '헬조선' 맞아?" 일주일 전께, 이번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친구 질문에 대수롭지 않게 답한 기억이 있다. "요새 애들이 너무 앓는 소리를 많이 하긴 하지"라고, 말해놓고도 정말 꼰대스러운 답을 했다. 하지만 이런 집안, 이런 일을 보고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말을 너무 쉽게 했나 싶어 또 반성이다. 여기저기서 '네가 바로 이 놈의 집안들의, 헬조선의 부역자는 아니냐'고 따져묻는 것 같다.

 

▲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가 직원들에게 보낸 사과문(사진: 대한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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